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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28 21:14
Larry Coryell (래리 코리엘)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69  



Larry Coryell (래리 코리엘)

 


"진정 좋은 솔로란 몸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일렉트릭 기타 연주를 본격적으로 재즈에 도입시킨 래리 코리엘(Larry Coryell)은 재즈 록의 선구자로 칭송된다. 록 음악에서 사용되는 디스토션과 벤딩, 초킹과 같은 기타 연주 주법을 재즈 연주에 적극 도입한 그는 일렉트릭 기타연주가 재즈 연주에서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기여했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Bitches Brew]를 발표하며 1969년을 '재즈 퓨전의 원년'으로 기억되게 하기 2년 전인 1967년, 동료인 비브라폰 주자 게리 버튼의 앨범 [Duster](1967)를 통해 그는 이미 쿼텟 형식의 재즈 형식에 컨트리, 블루스가 어우러진 재즈 퓨전을 선보였다. 거친 디스토션에 날카로운 울부짖음으로 점철된 일렉트릭 기타의 소음이 과연 재즈와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그로 인해 해답을 찾게 된다.

마일즈 데이비스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존 맥러플린(John Mclaughlin)과 자주 비교되는 그는 록, 재즈, 인도 음악, 스페인 플라멩코등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복합적으로 융화시킨 존 맥러플린의 기타연주처럼 화려하교 정교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블루스 추종자'라 할 만큼 그의 기타 연주엔 60년대 전 세계를 창궐한 블루스 록의 기운을 재즈에 온전히 이식해놓았다. 존 맥러플린이 다양한 음악 장르를 통한 퓨전 사운드를 창조 했다면 그는 60년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지미 헨드릭스의 블루스 록과 쳇 엣킨스(Chet Atkins) 섬세하고 감칠맛나는 컨트리 사운드의 영향을 흡수했다.

재즈학자들은 그의 기타연주로 재즈 록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가 마일즈 데이비스나 존 맥러플린처럼 굴지의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사가 아닌 존 바에즈(Joan Baez)와 같은 포크 가수가 소속되어있던 군소 레이블인 뱅가드(Vangard)에서 음반을 발표한지라 대중적으로 그가 '재즈 퓨전의 장자'라는 영광을 공인받기는 힘들었지만, 지금까지도 재즈 퓨전 연주에 몸담고 있던 기타 연주자들은 그를 '재즈 록의 창시자'로 기억하고 있다.

1943년 미국 택사스주의 Galveston에서 태어난 래리 코리엘은 4세 때부터 기타를 손에 잡고 탈 팔로우, 바니 케슬, 자니 스미스의 기타연주가 담긴 레코드를 통해 독학으로 기타연주를 익힌다. 얼마 후 그는 워싱턴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8년 로큰롤 밴드를 마이클 맨델(Michael Mandel)과 함께 조직함으로써 기타리스트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워싱턴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지만 이미 음악을 평생 목표로 삼았던 그는 이내 중퇴, 1966년부터 치코 해밀턴(Chico hamilton), 가보 스자보(Gabo Szarbo) 밴드에서 기타 주자로 활동한다.

1967년은 '코리엘의 해'였다. 비틀즈가 히피들과 의기투합을 선언한, 지미 헨드릭스가 기타연주의 신기원을 제시하며 음악계에 다사다난했던 1967년은 또한 그의 존재가 재즈계에서 뚜렷이 각인된 해였다. 동년배였던 비브라폰주자 게리 버튼의 리더작 [Duster](1967)는 이 블루스 추종자의 기타연주를 부각시켰고, 그로 인해 재즈에서도 마셜 앰프의 기타 소음이 매력적이게 되었다. 어느덧 이 24세의 젊은 기타리스트는 뉴욕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와 게리 버튼의 협연은 게리 버튼의 후속 작 [Lofty Fake Anagram](1967), [A Genuine Tong Funeral](1968)까지 지속된다.

이미 데뷔한 1967년부터 'Free Spirit'이라는 프로토 재즈 록(Proto Jazz Rock) 밴드를 이끌던 그는 얼마 후인 1969년, 고등학교 때 음악 친구였던 마이크 만델(오르간), 게리 버튼을 통해 만난 밥 모스(드럼)와 3인조 재즈 록 밴드 포어프레이(Foreplay)를 출범시키며 그의 첫 리더작이자 재즈계에 촉각을 곤두서게 한 문제작 [Coryell](1969)을 그해 1월에 발표한다.(마일즈 데이비스의 [In a Silent way](1969)보다 1개월이 빨랐음) 3인조라는 록 밴드의 기본 편성을 도입시킨 그는 강한 펑키리듬과 강렬한 기타 소음이 펼쳐지는 불세출의 명곡 "The jam with albert"로 본격적인 재즈 록의 출범을 알렸다.

그의 밴드 포어 플레이는 [Lady Coryell](1969), [Space](1970), [Barefoot Boys](1971), [Live at Village Gate](1971)을 발표했고 이후 호려한 위용을 갖춘 5인조 밴드 '11th House'로 새 출발한다. 재즈 록 명반대열에 끼는 [Introducing Larry Coryell & The 11th House](1972)를 발표하며 그의 연주력은 어느덧 최 정점에 다다랐다. 1975년까지 지속된 그의 밴드 11th House에서 들려준 그의 일렉트릭 기타연주는 비슷한 시기 존 맥러플린의 마하비쉬누 오케스트라나 칙 코리아의 리턴 투 포에버만큼의 대중적인 명성은 얻지 못했지만, 그의 뒤를 잇는 존 스코필드, 존 에이버크롬비, 래리 칼튼, 마이크 스턴, 알 디 메올라등 수많은 후배 기타리스트에게 영향을 준다.

70년대 중반부터 그는 어쿠스틱 기타 연주자로 전향, 솔로활동보다는 쟁쟁한 재즈 기타리스트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기억에 남을 수준작들을 남긴다. 존 스코필드, 스티브 칸, 에밀리 레믈러, 조 벡, 존 에이버크롬비, 레리 칼튼, 그리고 존 맥러플린과 파코 데 루치아와 함께 연주 앨범을 발표해 호평 받았고, 이러한 공동작업은 80년대 말까지 계속된다.

90년대 들어 지금까지 그의 연주는 차분하고 정통이라는 작법에 근거한 재즈 연주들로 지속되었다. 60- 70년대 청중들을 뒤흔들어놓았던 날이 선 그의 일렉트릭 기타연주는 다시 듣기는 어렵겠지만, 일렉트릭 기타연주가 중심이 된 재즈 퓨전이라는 혁신적인 연주 스타일을 창안한 그의 유산은 수많은 후배 기타리스트들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