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 
 C 
 D 
 E 
 F 
 G 
 H 
 I 
 J 
 K 
체크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어제 : 298, 오늘 : 821, 전체 : 343,183
 
작성일 : 20-02-28 21:17
Lee Morgan (리 모건)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17  



Lee Morgan (리 모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1938-1972
하드 밥이 주류를 이뤘던 50년대와 60년대 최고의 트럼펫터로써 재즈계를 풍미했던 리 모건은 1938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음악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며 어린 시절부터 재능이 뛰어나 신동으로 일컬어졌던 리 모건은 14살 때 그의 누나에게서 트럼펫을 처음으로 선물받았다. 그는 한동안 개인 교습을 받았는데 기량이 급속히 향상되자 Mastbaum 고등학교에서 정식으로 공부를 더 하였다.

15세 때부터 이미 베이스 주자 Spanky DeBrest와 함께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여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리 모건은 주급으로 클럽에 나갔는데 그 곳에서 우연히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그리고 그가 숭배하던 우상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을 만나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1956년은 중요한 해로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DeBrest와 함께 Art Blakey's Jazz Messengers가 Philadelphia 지방을 순회공연을 할 때 그들과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얼마 후에 디지 길레스피는 리 모건을 조 고든(Joe Gordon)대신 그의 빅 밴드에 고용하였고, 리 모건은 본격적인 재즈 아티스트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디지 길레스피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젊은 리 모건에게 솔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었다. 또한 리 모건은 디지 길레스피의 방송 테마 음악인 "A Night in Tunisia"를 연주하게 하여 각광을 받았다. 1956년 6월에 클리포드 브라운이 자동차 충돌 사고로 죽자 후계자를 물색하던 중 조숙한 리 모건이 거의 후보자로 내정되다시피 되었다. 따라서 여기 저기에서 그를 찾는 수요가 급증하였다.

1956년 블루 노트(Blue Note)를 통하여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인 [Lee Morgan Indeed!, Vol. 1]을 발표하여 재즈계의 주목을 받았다. 디지 길레스피의 악단에서 메인 테너 주자로 활동하던 베니 골슨과 자신의 오랜 친구인 오웬 마샬의 곡들과 몇 개의 스탠더드 넘버로 [Lee Morgan Indeed!, Vol. 1]을 완성하였고 그 결과는 기대이상이었다. 리 모건은 그 해 겨울 두 번째 앨범 [Lee Morgan Sextet]을 발표하였다. 이 앨범은 거의 모든 곡을 베니 골슨이 작곡하였고 오웬 마샬이 두 곡을 써 주었다. 이 두 명의 탁월한 작곡가를 배경으로 앨범에 참여한 연주자들은 신선한 신예주자들로서 후에 하드 밥 재즈의 걸작들에 대거 참여하게 되는 실력파 뮤지션들로 구성되었다. 그는 또한 행크 모빌리의 앨범 [Hanks Shout]에도 참여하였다.

그 이듬 해인 1957년 [City Lights], [The Cooker]와 같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발표함으로서 단숨에 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명반 [Blue Train]의 레코딩에도 참여하여 더욱 이름을 알렸다.

로이 엘드리지가 플레처 핸더슨 악단에서 퇴단하고 루이 암스트롱이 시카고의 킹올리버 악단에 참가한지 16년이 지난 후에, 다시 말해서 Bob이 Minton's 플레이 하우스에서 꽃 피워질 무렵 리 모건은 이제 겨우 3세였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인 급성장은 불과 18세의 나이에 밥을 창조한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기를 보여줬던 것이다.

디지 길레스피의 밴드에서 탈퇴한 리 모건은, 세 번째로 개편한 재즈의 매력을 진솔하게 내세우던 그룹 아트 블레키 재즈 메신저스에 가입하였다. 그는 펑키 재즈의 매력을 내세웠던 아트 블레키 재즈 메신저스의 일원으로의 활약하면서도 특징적인 자신의 앨범들을 꾸준히 발표하여 끊임없는 창작력을 보여주었다. 리 모건은 베니 골슨, 바비 티몬스, 지미 메리트 등과의 활동을 통하여 뛰어난 연주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어린 리 모건은 턴재적인 감성의 연주를 전개하여 명성을 드높혀 많은 젊은 광신자들을 확보하고 있었고 그는 그러한 자신의 명성을 독창적인 음악으로 보답하였다.

1958년 공개된 [Peckin' Time]을 비롯하여 소니 클락(피아노)과 어우러진 앨범 [Candy]을 발표하였고, 1960년에는 토드 존스와 함께한 [Minor Strain], [Lee-Way] 등을 계속 발표하여 발라드곡 "I'm A Fool To Want You"를 힛트시켰다. 그 후 대표작인 [Here's Lee Morgan]을 아피니티 레이블에서 공개한 그는 [Indestructible-Lee]를 발표하여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였다.

그러한 무리한 활동으로 인하여 건강이 나빠진 리 모건은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그의 고향 필라델피아로 돌아왔다. 그 곳에서 리 모건은  Jimmy Heath와 가끔 연주를 하였지만 거의 음악을 떠나 2년을 편히 쉬다가 다시 재즈계로 돌아와 당대 최고의 하드 밥 트럼펫터 Freddie Hubbard와 교체되어 재즈 메신저스에 다시 들어갔다.

리 모건은 재기작 [The Sidewinder]를 발표하며 당대 최고의 트럼펫터로서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색소포니스트 조 헨더슨(Joe Henderson), 피아니스트 배리 해리스(Barry Harris), 드러머 빌리 히긴스(Billy Higgins)등이 참여하여 완성도를 높여 주었던 이 작품은 명실공히 리 모건의 대표작이자 모던 재즈사에 길이 남을 명반으로 평가받았다. 그 중 리드미컬한 록 비트에 절묘한 끊김을 더한 타이틀곡과 조 핸더슨의 독특하고 호화로운 톤이 담긴 라틴 터치의 "Totem Pole"이 힛트를 기록했으며 앨범도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1964년 리 모건은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Herbie Hancock)과 색소포니스트 웨인 쇼터(Wayne Shorter)등과 함께 또 하나의 역작 [Search for the New Land], 그리고 아트 블래키, 맥코이 타이너와기량을 펼친 앨범 [Tom Cat]을 발표하여 자신의 최고 전성기를 이어갔다.

1965년으로 접어들어 조 핸더슨과 호흡을 맞춘 펑키 재즈가 담겨있는 앨범 [The Rumproller]와 색다른 사운드의 작품 [Infinity]를 발표하였으며 1964년에 제작한 [The Cat]이 뒤늦게 공개되기도 했다. 또한 행크 모빌리와 다시 함께 작업한 [Doppin]을 발표하여 음악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후 재즈 메신저스를 탈퇴한 리 모건의 그칠줄 모르는 창작력은 계속되어 1966년에 재키 맥레인(알토 색소폰), 행크 모빌리(테너 색소폰), 허비 행콕(피아노), 빌리 히긴스(드럼) 등과 팀웍을 이룬 앨범 [Cornbread]를 발표한 후 [Charisma], [The Rajah] 등을 계속 공개하여 하드 밥 트럼펫 연주자로 명성을 확고히 했다. 60년대 중반 이후 리 모건은 놀라운 창작력을 불태우며 펑키함과 아방가르드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음악으로 새로운 음악적 방향을 제시했는데 이 시기의 앨범들을 보면 리 모건이 다소 진보적이고 실험적 시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7년초 휴식기를 가진 다음 자신의 5중주단을 결성한 리 모건은 이듬해에 앨범 [The Procrastinator]과 [Caramba]를 공개하여 의욕적인 재출발을 시작했다. 이어 1970년 프레쉬 사운드(Fresh Sound) 레이블에서 라이트 하우스(Lighthouse)에서의 라이브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Live at the Lighthouse]를 발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71년엔 Capra Beach]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리 모건은 안타깝게도 1972년 2월 18일 뉴욕의 한 클럽에서 공연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던 중 말다툼 끝에 14상 연상의 부인이 쏜 32구경 총탄에 맞아 그만 숨지고 말았다. 사후 1957년부터 1965년까지 미발표곡들을 모은 [The Best Of Lee Morgan]이 블루노트에서 공개되었으며 OJC 레이블에서는 알 그레이(트럼본), 빌리 미첼(알토 색소폰, 테너 색소폰), 빌리 루트(테너 색소폰), 폴 웨스트(베이스), 찰리 퍼시프(드럼) 등과 함께한 [Dizz Atmosphere]가 소개되어 리 모건을 추모하였다.

리 모건은 처음에는 클리포드 브라운의 트럼펫 연주를 본받은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 때에도 그의 연주에는 악절 처리와 표현의 특이한 요소가 나타났으며, 이 요소는 아트 블레이키 재즈 메신저스와 함께 활동할 때(1958∼1961) 그의 독특한 스타일로 통합된 것이다. 그의 연주는 저돌적이었고 하프밸브로 음을 잇달아 더듬거리듯 연주함으로써 표현이 풍부해졌다. 원기왕성한 듯한 기분에서 우울한 기분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감정은 미묘한 멜로디와 리듬의 균형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는 작곡할 때도 반음계와 하프코드를 바탕으로 하는 화음 구조, 내림 5도의 보이싱, 단조, 정교한 리듬 등을 즐겨 사용했다. 리 모건은 비밥을 가장 풍부한 표현으로 연주한 트럼펫의 거장이며 가장 인기를 얻었던 연주자로 1991년 다운비트 명예의 전당에 봉정되기도 하였다.

다재다능한 트럼페트 명인 리 모건은 대연주가다운 기량과 풍부하면서 유연하고 특히 높은 음역에서는 줄기차고 힘찬 음색을 자랑스러워하였다. 그의 연주는 어떤 분위기에도 개의치 않고 언제나 정서적이었다. 쾌조한 연주는 긴장되고 열광적이며, 하드 밥적 기량을 보여줄 때는 통열하였고, 발라드 곡을 연주 할 때는 달콤하고 섬세하였다.

제 2의 클리포드 브라운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하드 밥 시대 최고의 트럼펫 연주자로 각광받았던 리 모건은 비록 34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지만 그가 생전에 남긴 여러 주옥같은 작품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재즈 팬들의 사랑을 얻고 있으며 여러 후배 뮤지션들이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