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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2-16 21:20
Little Steven & The Disciples Of Soul (리틀 스티븐 & 더 디시플스 오브 쏘울)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75  



Little Steven & The Disciples Of Soul

(리틀 스티븐 & 더 디시플스 오브 쏘울)

 

 
'아프리카는 굶주리고 있다.' 팝계의 성자 밥 겔도프가 그 사실을 새삼 일깨워 전세계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밴드 에이드와 라이브 에이드로 팝계는 아프리카의 기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난민 구호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가 굶주리고 있다면 아프리카의 최남단에 위치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자유에 굶주리고 있다.'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가 밥 겔도프로 인해 무관심으로부터 구제된 것처럼, 상식처럼 되어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굶주림' 이 문제 역시 한 의식있는 록 가수에 의해 세계의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주인공은 스티븐 밴 잰트였다. 그는 핍박받는 남아공의 흑인들을 위한 활동을 기획, 80년대 팝계의 주요 흐름이 된 '자선 활동' 물결에 또 하나의 획을 그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서슬퍼런 흑백 차별정책을 시행하는 반민주적 국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민주화 시대에 역행하는 남아공의 잔혹한 인종 차별과 흑인 억압정책을 우리는 아파르트헤이트(Aprtheid)라 이름한다. 인구는 흑인이 전체의 70% 이상인 반면 땅은 거의 90%를 소수 백인이 소유하고 있는 이 굴절된 나라에서 흑인들은 기본권이 철저히 박탈되어 투표, 거주 이전, 상거래 활동의 자유가 없으며, 백인의 교육은 의무인데 반해 흑인은 비의무적인 것을 비롯해 사회 활동 제부문에서 백인과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

UN은 이같은 폭압적 정책의 남아공 정부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회원국들에게 남아공과의 문화 및 스포츠 교류를 금하는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스티븐 밴 잰트의 기획 포인트 역시 바로 이 아파르트헤이트였다. 그는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남아공 소수 백인정부가 아파르트헤이트를 단순히 정치적 강령이라기보다는 신의 의지로 여긴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으며 “이러한 사실을 음악 공동체가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밥 겔도프가 한 것처럼 동료 가수들의 참여를 호소해 '아파르트헤이트에 항의하는 아티스트연합'을 조직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42명의 팝, 록, 재즈, 랩 아티스트들이 뜻을 함쳐 노래한 음반 <선 시티(Sun City)>가 그의 주도하에 제작되었다.

넓게는 아파르트헤이트에의 저항이었지만, 범위를 좁히면 음반의 타이틀이 된 '선 시티에 대한 반대'였다. 그가 선 시티를 자선 운동의 과녁으로 설정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보츠와나의 광대한 빈민 지역에 9천만 달러의 자본을 들여 설립된 초호화판 유흥지가 바로 선 시티. 보츠와나는 남아공과는 별개의 독립국으로 되어 있지만 남아공은 자국내 흑인을 이곳으로 강제 이주시켜 그들의 '고향'이라 못박아놓고는 자기 나라와는 무관하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남아공 프레토리아 정부는 보츠와나의 동향을 엄격히 감시했고 선 시티의 수익금의 상당 부분이 남아공 정부로 귀속되고 있었다.

남아공은 서방의 아티스트들에게 거액의 출연료를 제시하여 선 시티의 공연장에 등장시키는 방법으로 여론의 환기를 꾀했다. 81년 프랭크 시나트라가 개막 공연에 나선 것을 위시해 린다 론스태드, 로드 스튜어트, 그룹 퀸(리더 프레디 머큐리가 얼마 전 에이즈로 사망했다) 등이 섭외에 응했다. 그들은 UN의 남아공에 대한 제재를 무시하고 용기있게(?) 선 시티에 출연하는 대가로 각각 1백만 달러 이상의 거액 개런티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양심을 저버리게 하는 돈의 유혹이 무섭다!).

'아파르트헤이트에 항의하는 아티스트연합'의 가장 구체적인 목표는 서방의 유명 가수들이 거액의 섭외 공작에 넘어가 '반민주적인' 선 시티 공연에 나서는 행위를 저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거짓 고향으로 이주시키고 이산가족을 만들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야. 2천3백만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투표를 하지 못하는데, 우린 형제 누이를 등뒤에서 칼질하고 있는 거야. 우리 정부는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 건설적 공약이 로날드 레이건 정책. 그 동안에 사람들은 죽어가고 희망을 잃고 있는데. 이런 나약한 외교는 조크일 뿐이야 ... 날 매수할 수 없어. 얼마를 주든 관심이 없으니까. 내게 선 시티를 청하지 말아요. 난 출연하지 않을 테니까.' '선 시티'

스티브 밴 잰트는 이 음반이 가수들의 선 시티 출연을 재고하는 데 기여하리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서방의 유명 연예인들이 그의 활동에 자극받아 선 시티 공연을 자제했다. 그는 이 음반의 수익금 전부를 비영리 자선단체인 '아프리카 기금'(Africa Fund)에 기증, 남아공의 양심수와 흑인 가족, 미국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 단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선 시티>음반은 출반이 그리 쉽지 않았다. '밴드 에이드'나 '아프리카를 위한 아티스트 모임'은 저항적 색채가 깃들어 있긴 했지만 인류애의 성격이 강했기에 비교적 음반 출반이 순탄했다(밥 겔도프나 미국의 퀸시 존스 등 모임의 지휘자들이 정치색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의 정치적 현안인 관계로 그에 대한 입장표명은 정치적 이해를 엇갈리게 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정치색을 피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스티브 밴 잰트와 프로듀서 아더 베이커가 이 음반을 녹음할 때만 해도 출반 레코드 회사가 결정되지 않았다. 미국의 메이저 레이블은 정치적 목적을 당당히 앞세운 이 음반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선 시티>는 EMI 산하 캐피틀 레코드사가 85년 설립한 신생 독립레이블 맨해튼 레코드사를 통해 출반되었다. 가장 강렬한 80년대 저항이 음반 팬들에 접할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역사적 순간을 만든 아티스트 스티븐 밴 잰트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리틀 스티븐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고(<선 시티> 음반도 리틀 스티븐으로 이름을 걸었기 때문에 스티브 밴 잰트라는 이름과 이 음반을 연관시켜서는 곤란하다) 음악인들에게는 마이애미 스티브로 친숙하다. 1950년 11월 22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톤시에서 태어났지만 음악 활동은 뉴 저지 일대에서 했다. 뉴 저지라면 '노동계급의 대변인'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고향이자 활동 거점. 따라서 그를 거론할 때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역시 뉴 저지 출신의 가수 쟈니 리온을 빼놓을 수 없다. 세 사람은 음악 방향이 유사했던 데다가 활동 지역이 겹쳐 '흩어지고 뭉치기'를 반복하면서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70년대 초 셋은 재능을 결합해 좋은 그룹 음악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닥터 줌 앤 소닉 붐'이라는 밴드를 결성했지만 단명하고 말았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해산 뒤 자신의 백업 그룹 'E 스트리트 밴드'를 만들어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고 쟈니 리온과 스티브 밴 잰트는 듀엣으로 활동했다. 두 사람도 곧이어 흩어지기로 결정하고 개별적으로 뛰다가 리온이 '사우드사이드 쟈니 앤 디 애시베리 주크스'를 조직하면서 다시 뭉쳤다. 그란 스티브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레코딩 계약과 전국순회공연을 앞두고 자기에게 와달라고 요청하자 'E 스트리트 밴드'에 기타리스트로 가담했다. 하지만 그는 브루스의 밴드에 있으면서도 리온과 끈을 끊지 않고 그 그룹에 곡을 써주고 음반을 프로듀스 해주는 등 우정을 과시했다.

'파란만장한' 청춘시절을 보내면서 스티븐 밴 잰트는 노동계급적 가치와 정치적 의식에 눈뜬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노동자의 시각으로 미국을 바라봤던 반면 그는 '미국의 정치의 현실'에 관심을 쏟았다. 80년대를 통틀어 미국의 '가장 정치적인 록 음악인'이 다름아닌 스티븐이었다.

그는 브루스 스프링스틴 사단의 일원이면서도 그와 별개의 그룹인 '더 디사이플스 오브 소울'을 지휘, 독자 음반을 내어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할 수 있었다. '리틀 스티븐 앤 더 디사이플스 오브 소울'은 EMI 아메리카 레이블로 여러 장의 앨범을 발표했는데, 드높은 정치의식으로 인해 평론가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타임>지는 리틀 스티븐이 80년대에 출반한 4장의 앨범 모두를 해당 연도의 베스트 10 앨범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타임>지로부터 이같은 편애(?)를 받은 아티스트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참고로 리틀 스티븐 음반에 대한 <타임>지의 평을 들어보자.

*82년 <여자없는 남자(Men Without Women)> : 클래시 이래로 가장 자극적인 신예 밴드에 의한, 뒷골목길과 드높은 정신의 찬가
*84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 광활한 테마적 욕구와 그것을 가시화할 만큼의 '큰 마음'
*85년 <선 시티> : 올스타의 양심이 주류로 흘러들어간 가장 날카롭고 펑키(Funky)한 저항음악에 통렬함을 제공하고 있다
*87년 <자유-타협불가(Freedom-No Compromise)> : 올해의 가장 강경한 정치적 음반

리틀 스티븐은 <선 시티> 이전 음반을 통해 레이건 정부의 '제3세계에 대한 내정 간섭'을 강하게 비난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주변 상황에 책임질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런 성향을 보인 그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를 해집은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귀결이었는지 모른다.

음반의 성격은 불행히도 그에게 대중적 인기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보수적인 라디오 방송국이 정치색이 강한 그의 노래 방송을 꺼려 대중과의 접근이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음악적으로 또 음악사적으로는 성공한 뮤지션으로 기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는 팝계와 록계에 여전히 저항 정신이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고했으며 서방 가수들이 '음악의 고향'인 아프리카의 음악을 새롭게 인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룹 토킹 헤즈의 리더 데이비드 버노가 그룹 제네시스 출신의 피터 가브리엘이 아프리카 음악에 눈을 돌렸다. 폴 사이먼은 남아공에 날라와서 아프리카 리듬을 담은 음반 <그레이스 랜드>를 출반해 세계적 히트를 기록했다. 평론가들은 그들의 음악을 '월드 뮤직'이라고 일컬었다. 80년대 후반에는 월드뮤직 붐이 영미 팝계를 강타했다.

그들이 밟은 길은 리틀 스티븐이 가시덤불을 헤쳐 닦아놓은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