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sh (러쉬)
얼터너티브 폭발의 도화선이 된 밴드 픽시스(Pixies)의 소속 레이블 <4AD>는 그 외에도 전설적인 인디 록 밴드들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쓰로잉 뮤지스(Throwing Muses), 브리더스(The Breeders)와 같은 거물들이 이곳을 거쳐 유명 인사가 되었다. 또한 브릿 팝의 계보에서 절대 간과해선 안될 러시도 바로 이<4AD>가 자랑하는 그룹이었다.
기타의 노이즈를 꿈꾸는 것처럼 표현한다 하여 드림 팝(Dream Pop)의 일족으로 평가받는 러시는 그러나 같은 부류로 묶이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과는 달랐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이 시종일관 소음의 본질을 탐구했다면, 러시는 예쁜 멜로디를 그 위에 얹어 달콤한 기타 팝을 구사했다. 그래서 러시의 음악은 상대적으로 듣기가 수월하다. 'Light from a dead star', 'Single girl'과 같은 트랙들은 러시가 노이즈 그룹일 뿐 만 아니라 팝 밴드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벨리(Belly), 슬리퍼(Sleeper)와 같은 그룹처럼 러시도 여성이 주도했다. 특이한 것은 한 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미키 베레니(Miki Berenyi)와 엠마 앤더슨(Emma Andeson)이 모든 곡을 작사, 작곡하며 보컬까지 도맡는 '중앙처리장치'의 역할을 담당했다.
학교 동창인 두 여성의 의기투합으로 골격이 잡힌 러시는 1980년대 말, <4AD>사와 전격 계약을 맺고 데뷔 EP인 <Scar>로 돛을 올린다. 이후 많은 EP를 내놓고 활동하던 러시는 1992년이 되어서야 첫 정규 음반 <Spooky>를 공개했다. 이 앨범에서 이들은 노이즈 계열의 밴드로서는 이례적으로 싱글을 3개씩이나 내놓으며 열광적인 매니아 층을 구축한다.
러시의 큰 매력 중의 하나는 코러스인데, 그것은 메인 보컬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순기능을 하며 밴드의 장기로 자리잡았다. 징글거리는 기타 사운드 역시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다. 반복적인 저음을 바탕으로 한 미키와 엠마의 플레이는 청자에게 환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천상의 세계로 그들을 끌어올렸다.
이 모든 강점들이 집약된 음반이 양대 걸작인 <Spilt>와 <Lovelife>이다. <Spilt>에서 몽환적인 사운드를 실험한 이들은 후속작 <Lovelife>로 주류에서도 어필할 수 있는 멋진 멜로디 감각까지 연출해내며 숨겨진 브릿 팝의 보스로 등극했다.
특히 인디의 느낌과 주류의 감성이 만나 변증법적으로 승화된 유니크한 음반 <Lovelife>는 두 여성의 작곡 실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음을 알렸다. 이 앨범을 듣고 이들이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출신이었다고 믿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러시의 재능은 재기 넘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앨범은 결국 '백조의 노래'가 되었다. 미키 베레니의 옛 연인이자 밴드의 드러머였던 크리스 액랜드(Chris Acland)가 1996년 목을 매어 자살하면서 밴드는 와해되었다. 10여 년 동안 함께 음악을 하던 동료의 죽음은 이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분명 더 보여줄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는 '끝'이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들이 남긴 훌륭한 곡들은 모던 록 팬들에게 재평가를 받으며 새롭게 소생했다. 허나 이렇게 독특한 감수성을 소유한 밴드가 어이없게 해체하게 되었다는 것은 여러 모로 불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