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rry Carlton (래리 칼튼)
"톤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다면 일류 기타리스트라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언제 어디서 듣더라도 아! 바로 저 음색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듣는 사람들이 알아 차려야만 진정한 프로 뮤지션인 것이다."
부드럽고 편안한 퓨전재즈 기타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는 래리 칼튼. 그는 또한 작곡자로 보컬리스트로 그 명성을 확고히 하고 있는 뮤지션이다. 스튜디오 기타 세션주자를 시작으로 탁월한 연주실력을 들려준 래리 칼튼은 블루스 필(feel)을 제대로 간직한 재즈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는다. 그는 미국 내에서 음반 녹음작업 시 가장 많이 부름을 받는 세션맨으로서 1970년대부터 화려한 경력을 쌓으며 세련된 기타 플레이를 선보이며 팝 음악계에 '백만 응원군'과 같은 연주자로 부상한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 않는 정확한 연주실력, 날이 선 듯한 날카로움이 배어나는 그의 메이저 레이블 첫 리더 작 [Larry Carlton](1978)은 이미 오래 전 국내 해적판 시장을 통해 유통되며 수많은 일렉트릭 기타연주 지망생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래리 칼튼은 1948년 LA교외의 토렌스에서 로렌스 어진 칼튼(Lawrence Eugene Carlton)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6살 때부터 기타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10살 때 라디오를 통해서 조 패스(Joe Pass)의 음악을 듣고 재즈기타를 배우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래리는 래리 칼튼 트리오를 조직해 LA의 클럽가에서 연주활동을 하였다. 이때부터 재즈와 블루스 음악에 차츰 관심을 갖게 되어 Joe Pass와 B.B. King의 연주 스타일을 완전히 터득하고 난 다음부터는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와 바니 케셀(Barney Kessel) 그리고 블루스 연주자들이 동시에 그에게 큰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마력 같은 솔로 즉흥 연주를 남겼던 테너 색스폰 주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은 강렬한 솔로 연주에 능한 재즈 기타리스트로서 내공을 다지는데 도움을 줬다.그는 기타 연주기량을 고급 나이트클럽과 유명한 Los Angeles 스튜디오에서 갈고 닦았다. 고교 졸업 후엔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 편곡 지휘 등을 익혔다. 이즈음 래리는 여러 컨테스트에도 참가해 최우수 솔로 기타리스트 상을 휩쓸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래리는 이름이 차츰 알려지게 되었고, 그러한 명성이 계속되자 대학공부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너무 바빠’ 대학을 중퇴하게되었다. 20세가 되던 1968년, 래리 칼튼은 독립 레이블 UNI를 통해 그의 첫 앨범[With Little Help From My Friend]를 발표한다. 자신의 곡이 아닌 비틀즈의 명곡들을 그의 깔끔한 기타연주로 해석한 첫 앨범은 현재에 와서도 자신이 평하길 '함량 미달'이라고 하지만 이를 계기로 그는 포드 자동차 커머셜(상업 광고) 배경 음악을 담당했던 전속 밴드 더 고잉 씽(The Going Thing)에 가입할 기회를 얻는다. 1969년 여름 The 5th Dimension의 전미 투어에 참가하는 것을 계기로 본격 세션 기타리스트로의 길을 걷게되어 1970년부터 스튜디오 세션, 녹음 연주회를 시작하였다.
1969년경에 래리는 전 미국인이 다 아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해 12월부터 시작된 NBC TV의 [미세스 알파벳]이라는 어린이 대상 프로에 백 뮤지션으로서가 아니라 주역급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이 프로에서 그는 ‘래리 기타’라는 코너를 통해 주제가를 작곡 연주해 많은 어린이들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어린이들 사이에 '깁슨 기타 아저씨'로 통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그는 LA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세션 기타리스트가 되었고 이런 일들을 통해 컨트리, 록, 블루스, 재즈 등 다양한 장르들을 몸에 익혀갔다. 또한 1972년에 블루 썸(Blue Thumb) 레코드사와 계약하고 [Singing/Playing]이란 솔로앨범을 발표하였다. 1971년에는 당시 대중적인 재즈 펑크(jazz Funk)로의 변신을 감행한 재즈 퓨전 밴드 크루세이더즈즈(Crusaders)의 객원 연주자로 초빙된다. [Crusaders 1](1971)에서부터 귀에 아른거리는 훅(hook)이 감지되는 기타 솔로를 선보인 래리 칼튼은 이후 1976년까지 크루세이더즈 이름으로 발표한 13장의 음반에서 일렉트릭 기타 세션으로 참여한다. 1년에 평균 50일 이상을 크루세이더즈와 함께 한 래리 칼튼은 이를 계기로 흑인 블루스의 느낌이 재대로 배어있는 기타 연주의 실력을 축적했다. 그는 크루세이더즈와 투어를 하는 동안에도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수백 편의 레코드를 취입하기 위하여 스튜디오 세션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리듬적이며 블루스적인 스타일을 개발한 것은 바로 크루세이더즈와 함께 할 때부터였다. 그는 100편 이상의 골드 앨범을 발매하였다.
수많은 Los Angeles 스튜디오 뮤지션들과 같이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래리 칼튼도 수년 전에 솔로리스트로 독립해서 용감하게 혼자 나갈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돈도 벌고 유명한 뮤지션들과 녹음도하며 위험 부담율이 적고 좀더 편안한 세션맨으로 현직을 그냥 계속 할 것인지, 이 문제를 놓고 취사선택의 기로에 써 있은 적이 있었다. 전자 기타 연주자들을 위하여 다행히 그는 전자를 택했다. 그리고 1978년이래 Warner Bros., MCA, GRP Records 등에서 독자적인 그의 이름으로 레코드를 내 놓았다. 1970년대와 80년대 초부터 Carlton의 스튜디오 Credits, 연주자들 중에는 Steely Dan, Joni Mitchell, Michael Jackson, Sammy Davis Jr., Herb Alpert, Quincy Jones, Bobby Bland, Dolly Parton, Linda Ronstadt 외 수많은 뮤지션들과 그룹 등이 포함된다. 특히 포크 록의 여장부 조니 미첼(Joni Mitchell)이 재즈 록을 표방하며 발표했던 [Court & Spark](1974)에서 래리 칼튼의 기타 연주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날아갈 듯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며 그 앨범이 재즈 록으로의 색채를 갖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재즈 록 밴드 스틸리 댄(Steely Dan)의 1976년 앨범 [Royal Scam]에 수록된 "Kid Charlemagne"에서 들려준 그의 섬뜩한 기타 솔로는 록 전문지 <롤링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3대 기타 세션'들 중 하나로 뽑히는 영광도 얻는다.
세션 활동 중에도 자신의 솔로 앨범을 틈틈이 구상해오면서 1973년 독립 레이블 블루 섬(Blue Thum)을 통해 두 번째 솔로 앨범 [Playing/Singing]을 발표했고, 이후 1977년 6년 간 함께 연주해온 크루세이더즈를 떠나 자신의 집에 'Room 335'라 불리는 스튜디오를 완공시키고 여기서 자신이 직접 프로듀스하고 곡을 쓴 연주 앨범제작에 몰두한다.
그의 실질적인 첫 리더작이자 메이저 레이블인 워너 브라더사를 통해 발표한 [Larry Carlton](1978)은 치밀한 곡 구성력, 손색없는 연주력, 팽팽한 긴장감의 스피드 3박자가 어우러진 보기 드문 재즈 퓨전 명반이었다. 같은 해 일본에서 화제를 모았던 [Mr. 335 Live in Japan]을 발표, ES 335 스테레오 기타와 밸리 아트 스트래토 캐스터 기타를 라이브 공연서 능수 능란하게 연주해낸다. 이후 워너브라더사에서 잇따라 [Strike Twice](1980), [Sleepwalk](1981), [Eight Time up](1982), [Friends](1983)를 내놓는다. 특히 [Friends]엔 재즈 보컬 알 자로(Al Jearreu) 참여, 그의 독특한 스캣 연주를 들려준 "Tequila'에 힘입어 1984년 그래미 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한다.
이후 MCA로 이적,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만 꾸며진 [Discovery](1986)에서 래리 칼튼은 1980년대 백인 소울 가수 마이클 맥도널드(Michael Mcdonald)의 곡 "Minute by minute"를 감칠맛 나는 기타 연주곡으로 해석, 이듬해 그래미상 '최우수 팝 연주'부문 상을 받는다. 같은 해 발표된 라이브 명반 [Last Nite](1987) 역시 그래미상 베스트 재즈 퍼포먼스 부문에 노미네이트된다.
한창 음악적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는 1988년 [On Solid Ground]앨범 작업 도중 어처구니없는 총격 사고를 당한다. California Burbank 근처에 있는 그의 개인 소유 스튜디오 밖에서 총기를 휘두르는 소년들 때문에 목에 총을 맞았다. 그 총탄은 그의 성대를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영구적인 정신 충격을 남기는 심각한 신경 장애를 일으켰다. 그러나 철저한 치료와 확고 부동한 마음가짐으로 1989년 앨범 [On Solid Ground] 작업을 완성하였다. 래리 칼튼은 이유 없는 총기 난사로 인한 무모한 희생자를 돕기 위한 비영리 단체, Helping Innnocent People (HIP)를 설립하였다. Carlton이 1996년 GRP 레코드사에서 최근에 발매한 두 편의 앨범은 [Gift],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등이다. 그외 1990년 첫 베스트 앨범 [Collection], 1992년 작 [Kid Gloves], 1993년 작 [Renegade Gentleman]이 있다. 그는 계속 1995년 Edsel에 [Playing /Singing]을 발매하였다. 특히 그의 라이벌이자 스튜디오 세션 연주자로 오랫동안 각광받았던 재즈 기타리스트 리 릿나워(Lee Litner)와 함께 한 1995년 작 [Larry & Lee]는 1990년대 발표한 재즈 기타연주 명반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후 1998년부터 재즈 팝 그룹 포 플레이(Four play)에서 리 릿나워를 대신해 정규 멤버로 활동한 것 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새 세기가 시작된 2001년, 그룹 토토(Toto)출신 기타리스트 스티브 루카서(Steve Lukather)와 함께 한 불꽃튀는 연주력 대결이 압권인 [No substitution: Live in Osaka]를 발표, 그를 애타게 기다려온 팬들에게 다시 한번 화려한 기타연주를 선사했다.
대부분의 기타리스트들이 스케일을 패턴으로 해서 연주하지만 래리 칼튼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는 스케일이 느껴지지 않는 멋진 보이싱으로 마치 노래하는 듯한 연주를 구사하는 것이다. 특정 스케일을 연속시켜 프레이즈할 때도 어딘가에 포인트를 주어 변화를 갖게 해 메카니컬한 애드립이 되는걸 억제하고 있다. 또한 그의 음악성에서는 기본적으로 블루스를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을 더욱 살리기 위해 재즈의 스케일이나 코드를 많이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솔로 이외에 리듬기타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다. 오른손의 다운과 업 스트로크 모션을 한껏 이용해 16비트 리듬거팅의 교과서적인 연주를 행한다. "Kid Charlemagne"-스틸리 댄-, "Chain Reaction"-크루세이더즈- 등을 들어보면 배킹에 바리에이션을 가하며 시종 변화를 주는 지(知)적인 리듬기타를 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