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onel Hampton (라이오넬 햄턴) 비브라폰 주자로, 드러머로 그리고 밴드리더로 활동했던 라이오넬 햄턴(Lionel Hampton)이 재즈계에 남긴 족적은 사실 일일이 다 열거하긴 힘들다. 그가 재즈 씬에서 활동했던 지난 60여년동안 발표한 음반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또 그와 함께 했던 재즈 뮤지션들도 베니 굿맨(Benny Goodman)이나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그리고 찰리 파커(Charlie Parker)에서 퀸시 존스(Quincy Jones) 등 다양한 세대에 걸쳐있다. 게다가 비브라폰이라는 악기를 연주했기 때문에 그가 후대의 다른 많은 비브라포니스트들에게 끼친 영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대체적으로 라이오넬 햄턴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한다면, 스윙재즈에 기반한 음악들을 주로 들려주었었다는 것과 비브라폰이라는 악기를 통해 재즈 씬에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작곡가로써, 빅밴드리더로써의 면모 등을 꼽을만 하겠다. 1908년 4월 20일 켄터키주 루이스빌에서 태어난 햄턴은 1916년에 그의 가족을 따라 시카고로 이주하여 드럼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고, 무명의 여러 밴드를 전전하면서 활동하였다. Chicago Defender Newsboys Band에서 드러머로 처음 연주하기 시작한 그가 원래 숭배했던 스승은 가끔 실로폰을 연주하는 20년대 드럼 주자 Jimmy Bertrand이었다. 라이오넬 햄턴은 서부에서 다양한 그룹들, 즉, Curtis Mosby의 Blue Blowers, Reb Spikes, 1929년 그가 레코딩에 함께 데뷔했던 폴 하워드(Paul Howard)의 Quality Serenaders, 그가 Louis Armstrong을 만나게 된 Les Hite의 band 등과 함께 연주하였다. 1930년에 루이 암스트롱을 만나 레코딩에 들어간 그는 그때부터 비브라폰 주자로 활동했다. 이어 많은 영화에 레스 히트(Les Hits)밴드와 출연하기도 했다. 1936년에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라이오넬 햄턴을 발견한 베니 굿맨에 의해 Teddy Wilson, Gene Krupa 등과 같이 베니 굿맨 쿼텟과 녹음에 들어갔다. 그리고 6주 후에 정식으로 베니 굿맨 악단에 가입하였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솔로 주자로서 그의 열정은 베니 굿맨을 흐뭇하게 하였고, 라이오넬 햄턴은 스타가 되어 베니 굿맨과 함께 영화에도 출현하고, 1938년 그 유명한 Carnegie Hall Concert에도 출연하고, 매일 밤 라디오에도 출연하였다. 한편 1937년 그는 스윙의 명사들로 조직된 올스타 그룹을 모아 그들과 함께 Victor에서 정규적으로 리더로서 녹음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있었던 이 명연주들을 6장의 LP 셋트로 편집하여 Bluebird에서 재발매 하였고, 조끔씩 CD로 나오기까지 하였다. 라이오넬 햄턴은 때로는 대타자로 드럼도 치고, 보컬도 하면서 1940년까지 베니 굿맨과 함께 일하였다. 베니 굿맨과 함께하며 라이오넬 햄턴은 비브라 하프를 절묘하게 연주한 "When Lights Are Low"를 히트시키기도 하였다. 그후 베니 굿맨과 헤어지고 자신의 빅 밴드를 결성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그룹은 캣 앤더슨을 비롯하여, 일리노이즈 자켓, 클리포드 브라운 그리고 퀸시 존스와 함께 활동하면서 여러 곡을 히트시켰다. 한편으로 밥 이후 시대의 훌륭한 베이스 연주자인 찰스 밍거스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활동하면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또한 그는 유럽 공연을 치루었으며, 일본을 비롯한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등을 순회하면서 텔리비젼에 출연하였다. 1957년에 런던에 있는 로얄 페스티벌 홀에서 연주를 가진 그는 1978년에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백악관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1978년 뉴 포트 재즈 페스티벌에 출연하여 공연을 가진 라이오넬 햄턴은 그 실황을 담은 앨범 [Newport 78]을 공개하였다. 그 해에 자신의 독자적인 레이블 Who's Who's를 만들어 재즈에서부터 메인스트림 레코딩을 하기 시작하였다. 80년대 초반에 그의 밴드는 전세계를 순회하면서 공연을 펼쳤다. 1982년에 일본에서 녹음한 [Made In Japan]을 발표한데 이어 1983년 남부 캘리포니아의 대학에서 음악이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라이오넬 햄턴은 1920년대를 기점으로 재즈 씬에 첫 발을 내딛었는데, 당시 재즈 씬은 스윙재즈의 바람이 밀려오던 때로 추정된다. 자연스럽게 햄턴은 스윙재즈에 동화되면서 베니 굿맨, 루이 암스트롱, 테디 윌슨(Teddy Wilson) 등 그 당시 많은 활동을 펼쳤던 뮤지션들과 교분을 갖고 활발한 활동을 선보이며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중요한 점은, 라이오넬 햄턴이 단지 스윙재즈 뮤지션이었다는 사실의 강조가 아닌,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인 임프로바이제이션과 스윙 가운데 “스윙”의 측면이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시대적인 음악적 방향이 뮤지션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스윙재즈 이후 도래하기 시작한 비밥과 모던 재즈가 더욱 견고한 리하모니제이션을 통한 편곡에 의해 솔로파트의 비중이 커져 나가는 양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당시 라이오넬 햄턴의 솔로라인에 대해서는 크게 거론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또한, 라이오넬 햄턴은 재즈 씬에서 거의 최초로 비브라폰이라는 악기를 도입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그가 처음 다룬 악기는 비브라폰이 아닌 드럼이었다. 드러머로써 음악활동을 하던 햄턴이 비브라폰을 연주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였는데, 종종 드럼이 아닌 실로폰을 연주하곤 했던 햄턴은 1930년 루이 암스트롱과 녹음하던 도중, 녹음실 구석에 있던 비브라폰을 연주할 수 있냐는 루이의 제안에 처음 비브라폰을 연주하게 되었다 한다. 우연한 기회에 운명이 바뀌어버린 격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때부터 햄턴은 비브라폰이 가진 매력에 빠져, 재즈계에 드러머가 아닌, 비브라포니스트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라이오넬 햄턴은 훌륭한 작곡가이기도 하였는데 "Evil Gal Blues", "Midnight Sun", "Flyin' Home" 등의 곡들이 많은 재즈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곡들이다. 활동기간이 길었던 만큼 그가 작곡한 곡들은 무수히 많은 편인데, 이 부분에서 단순한 연주자로써가 아닌 뮤지션으로써 햄턴이 욕심을 가졌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작곡에서 나타나는 뮤지션으로써의 욕심은 그가 이끌었던 빅밴드에서도 자연스레 나타난다. 사실 일반적인 트리오나 쿼텟 등의 소규모 캄보 밴드와는 달리 빅밴드는 정교하며 앙상블의 호흡이 중요하기 때문에, 더욱이 밴드리더의 역할은 더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햄턴에게 있어 빅밴드에서의 리더활동은 단순히 비브라포니스트가 아닌, 뮤지션으로써 자리매김 할 수 주요한 활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당시 약관의 나이에 재즈계의 거목으로 클 것으로 기대되던 (하지만 26세의 나이로 돌연 죽음을 맞이한...) 트럼펫터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이 라이오넬 햄턴 빅밴드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었다. 2001년 1월, 15년 동안 사용해 오던 악기, 비브라폰을 국립미국역사박물관에 갖다놓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 라이오넬 햄턴은 2002년 8월 31일 심장병을 앓다가 안타깝게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20년대에 활동하던 레드 노르보(Red Norvo)에 이어 비브라폰 주자로 재즈계에서 다양하고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뮤지션으로 평가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