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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2-27 19:24
Motley Crue (머틀리 크루)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10  



Motley Crue (머틀리 크루)
 


 
80년 초, LA에서 런던이라는 그룹의 멤버로 활동하던 니키 식스(본명:프랭크 칼튼 세라피노Frank Calton Seraphino)는 슈트 19에서 드럼을 치던 토미 리를 만나면서 뭔가 새로운 밴드를 구상하게 되었다. 이들이 지방신문에 낸 모집 공고를 보고 기타리스트 믹 마스(Mick Mars)가 합류했고 클럽 가에서 만난 빈스 닐(Vince Neil)을 팀에 영입해 본격적으로 밴드가 출범한다. 밴드의 이름인 머틀리 크루는 믹 마스의 별명이자 '애꾸눈 해적'을 일컫는 'Mottley Krue'에서 따왔으며 o와 u 위에 붙은 우물라우트는 단순히 '유럽적인 이미지가 좋아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 이들은 자신들의 주 활동지역이던 LA 클럽 가를 돌며 연주를 했는데, 첫 연주 때부터 관객과 패싸움을 벌이며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81년 2월에 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Stick To Your Guns]라는 싱글 1000매를 제작해 배포하며 본격적인 클럽 순회 공연에 돌입했다. 거친 콘서트 매너와 짙은 분장으로 어느 정도 유명해진 이들은 동년 6월에 자신들이 만든 레이블에서 데뷔앨범 [Too Fast for Love]를 발매했고 이 앨범은 메틀 매니아와 평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수록곡 'Piece of Your Action'이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데 이어 'Live Wire'가 톱텐에 랭크되었고 데뷔앨범 이전에 발표했던 싱글 [Stick To Your Guns]와 [The Toast of The Town] 등도 다시 한번 인기를 누린다.

2집 [Shout at the Devil]은 83년 10월에 발표됐는데, 이 앨범은 당시에만 35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해, 이들을 일약 슈퍼스타로 발돋움시켰다. 당시 메이저 데뷔작 [Metal Health]로 빌보드 앨범차트를 석권한 콰이어트 라이엇(Quiet Riot)과 함께 이들은 LA메탈의 신호탄을 쏘아올리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이들의 공격적이고 비윤리적인 무대 매너와 음악 성향은 평론가들의 표적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이듬해에는 싱글 'Looks That Kill'이 차트 54위에 오르는 쾌조의 성적을 올리기도 했으며, 이어서 'Too Young To Fall In Love'가 90위에 랭크되었다. 이때까지 별다른 걸림돌이 없던 머틀리 크루였지만 성공과 더불어 시작된 멤버들의 방탕한 생활은 결국 물의를 일으키고 만다. 84년 말에 빈스가 자신의 스포츠카로 음주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 옆에 타고 있던 하노이 록스(Hanoi Rocks)의 드러머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빈스는 음주운전 혐의로 기소되었고 87년까지 지속된 마라톤 재판 끝에 결국 100만 달러의 벌금과 19일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보석으로 풀려난다.

이렇듯 밴드가 가장 어려울 때 발표한 3집 [Theatre of Pain]은 발매 9주만에 플래티넘을 따내며 머틀리 크루의 인기를 재확인시켰다. 첫 싱글 'Smoking in The Boys Room'이 차트 16위까지 오르는 큰 히트를 기록했고 이어서 국내에서 유난히 인기 있었던 아름다운 발라드 곡이자 MTV가 방영한 첫 발라드 곡인 'Home Sweet Home'이 차트 89위에 올랐다.

3집 발표후 2년만인 87년에 발매된 4집에선 타이틀곡이자 첫 싱글인 'Girls, Girls, Girls'가 MTV에서 폭발적 인기를 모으며 챠트 12위에 올랐고, 역시 뮤직 비디오 덕을 많이 본 'You're All I Need'가 83위에 올랐다. 덕분에 앨범은 쉽게 전작 이상의 판매고를 돌파했다. 또한 이때부터 이들은 그간 키스(KISS)를 연상케 했던 화려한 분장을 지우고 맨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화장을 대신해서 멤버 전원이 충격적이고 엄청난 문신을 전신에 휘감고 나타나 팬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이래저래 음악과 관계없이 수많은 가십을 몰고 다니던 이들은 89년 초에 건즈 앤 로지즈(Guns N' Roses)와 한판 대결을 벌일 뻔한 해프닝을 일으키기도 한다. 무슨 이유에선지 빈스와 건즈 앤 로지스의 이지 스트래들린(Izzy Stradlin)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에 격분한 액슬 로즈(Axl Rose)가 결투를 신청, 결투장소인 LA의 한 레코드점으로 빈스를 비롯한 머틀리 크루 멤버들이 달려갔다. 그러나 액슬이 총기를 소지한 보디가드들을 데리고 오는걸 발견한 이들은 재빨리 그 곳을 벗어났다는 것이 사건의 개요이다. 엑슬 로즈는 자신의 보디가드를 대동하고 크고 작은 시비와 싸움을 종종 벌이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 보디가드들을 시켜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을 린치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다.

89년 8월 본 조비(Bon Jovi), 신데렐라(Cinderella),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 스콜피언스(Scorpions), 스키드 로우(Skid Row) 등이 참가한 "모스크바 평화 음악 축제(Moscow Music Peace Festival)"에 참여한 머틀리 크루는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언제나 사고를 몰고 다니는 니키 식스가 'Kill Bon Jovi'라고 쓴 베이스를 들고 무대에 올라 엄청난 문제를 야기시켰다. 결국 머틀리 크루는 이 공연이 끝난 즉시 본 조비와 함께 소속돼 있던 매니지먼트사 맥기(McGhee)와 결별하고 만다.

이런 소동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매된 5집 [Dr. Feelgood]은 발매 4주만에 앨범차트 정상에 오른다. 당시 국내 금지곡이었던 첫 싱글 'Dr. Feelgood'이 놀랍게도 6위까지 오르며 머틀리 크루 최고의 히트곡이 됐으며, 이어서 'Kickstart My Heart'가 27위, 'Without You'가 8위, 'Don't Go Away Mad'가 19위, 'Same 'Ol Situation'이 78위에 올랐고, 앨범은 지금까지 6백만장이나 팔렸다. 팬층이 넓지 않은 헤비메틀 앨범으로서는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은 또한 91년 1월에 열린 어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는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포이즌(Poison)의 [Flesh & Blood], 에어로스미스(Aerosmith)의 [Pump]를 누르고 '최우수 헤비메탈 앨범상'을 수상하는 영예까지 거머쥔다.

5집의 큰 성공으로 너무나도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이들은 91년 11월에 'Primal Scream'을 비롯한 3곡의 신곡과 함께 자신들의 10년 활동을 정리하는 베스트 앨범을 발표한다. 상승세를 타고 있던 밴드는 92년에 어이없게도 빈스를 해고해 머틀리 크루를 아끼는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빈스와 니키 사이에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머틀리 크루는 공석이 된 자리에 스크림(Scream) 출신의 존 코라비(John Corabi)를 앉혔다. 갑작스런 해고에 분개하던 빈스 닐은 마음을 정리하고 93년에 자신의 솔로앨범 [Exposed]를 발표했는데, 댐 양키즈(Damn Yankees)의 타미 쇼(Tommy Shaw)와 잭 블레이즈(Jack Blades)가 빈스를 도와 작곡에 참여했으며, 빌리 아이돌(Billy Idol) 출신의 명기타리스트 스티브 스티븐스(Steve Stevens)도 찬조해 현란한 기타솜씨를 뽐냈다.

머틀리 크루도 이에 질세라 94년 4월에 셀프타이틀 앨범 [Motley Crue]를 발표한다. 당시 얼터너티브의 폭풍이 불어닥치던 음악계의 상황도 그랬지만 어쨌든 대다수 팬들은 빈스가 없는 머틀리 크루를 크게 반기는 모습은 아니었다. [Motley Crue]의 쓰라린 실패 이후 고심하던 이들은 역시 빈스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는지 결국은 97년에 빈스를 다시 불러들인다. 빈스도 95년에 발표한 솔로 2집이 좋은 성과를 올리지 못해 별 활동 없이 지내던 터라 이들은 다시 한번 뭉쳐 8집 [Generation Swine]을 내놓았다. 이 앨범은 뜻밖에도 많은 팬들의 기대와 달리 90년대식 얼터너티브를 수용하고 있는 문제작이었다.

애초의 멤버로 다시 돌아온 머틀리 크루에 대한 팬들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는 8집이 발표하자마자 앨범차트에 4위로 진입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얼터너티브한 머틀리 크루를 팬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순위는 급강하를 거듭해 5주후에 차트에서 사라졌고, 앨범 판매도 골드를 따내는데 그치고 만다. 이들의 새로운 시도는 90년대식 음악에 익숙한 세대들과 예전부터 지켜보던 골수팬들, 그 어느쪽도 공략하지 못한 것이다.

98년에 이들은 새앨범 대신 뜻밖에도 베스트앨범인 [Greatest Hits]를 발매했는데, 10년을 기념하는 91년도의 베스트 앨범과는 달리 뭔가 단물빼기 성향이 짙은 앨범이었고, 반응도 별로여서 차트에 3주간 머물르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