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y Robbins (마티 로빈스)
마틴 데이빗 로빈슨은 1925년 9월26일 아리조나의 글렌데일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해군을 제대하고 프로가수로 노래를 시작하면서 마티 로빈스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Frankie Starr가 주도한 지방밴드에서 기타를 치기 시작했으나 곧 메사근방의 KTYL방송국에서 라디오방송에 첫발을 내딛었다. 1940년대 말기에 마티로빈스는 피닉스의 KPHO방송국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이른아침 라디오쇼인 '척 웨이건 타임'을 진행했고, 미침내 그는 같은 계열 TV방송사에서 '컨츄리 카라반'이란 15분짜리 프로그램을 이끌게 되기에 이르렀다.
1951년 컨츄리 가수인 지미 디킨스가 그의 쇼에 출연하면서 그의 운명은 바뀌게 되었다. 콜럼비아 레코딩 아티스트와 그랜드 올 오프리의 스타들이 마티로빈스의 목소리에 감명을 받아 그를 콜럼비아 A&R Man Art Satherley에 추천을 했다. 레코딩 개척자들은 디킨스의 제안에 관심을 가지고 노래하는 젊은 가수를 보기위해서 여행을 했다.
1951년 5월에 마티로빈스는 콜럼비아사와 레코딩계약을 맺었고 1972년까지 콜럼비아사에 남았었다.마티 로빈스의 첫 번째 싱글앨범은 1951년 11월에 녹음이 되었지만 챠트의 어느곳에도 그의 불꽃을 태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직접 쓴 "I'll Go On Alone"인 그의 세 번째 앨범은 DJ들과 팬들의 호응을 얻어 내는데 성공했다. 이 레코드는 빌보드 컨츄리챠트에서 18주동안이나 1위에 머물렀다. 이기세를 몰아, 곧 마티로빈스는 1953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랜드 올 오프리로 초대되었다. 락앤롤이 히트할 때 마티로빈스는 "That's All Right" and "Maybelline"같은 그의 버전의 산뜻함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를 확고한 한 명의 중요한 스타로 만들어준 노래는 1956년에 녹음한 멜빈 엔슬리의 곡인 "Singing The Blues"였다. 이 노래는 13주동안 인상적인 모습으로 컨츄리챠트 1위에 머물렀으며 또한 팝챠트의 20위권에 진출을 하기도 했다.
1957년에 마티로빈스는 제작자인 레이 코니프와 함께 세션으로 뉴욕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그는 5개의 필수적인 "A White Sport Coat"같은 1950년대 무도회곡을 녹음했다. 어린시절부터 마티 로빈스는 서부이야기속의 오랜 사랑문제와 음악을 즐겼다. 매주 그는 어렵게 번돈의 사분의 일을 '진 오트리'의 영화를 보면서 지방극장에서 썼다.
1959년에 그는 Gunfighter Ballads 와 Trail Song이라는 획기적인 개념의 앨범을 발표했다. 이 레코드는 'Cool Water'같은 서부고전음악을 커버버젼한 것과 그의 곡들인 'Big Iron'이나 'El Paso'같은 두부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지막 노래인 '엘파소'는 두 개의 그래미상을 첫 번째로 그에게 안겨주었다.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까지 마티 로빈스는 'Raiders of Old California, Badge of Marshall Brennan, Country Music Caravan 과 Country Music Jamboree'를 포함한 계속되는 영화에 출현을 하였다. 또한 그는 자동차례이서에서 NASCAR 서키트까지 그의 취미를 증대시켜 나갔다. 사실상 그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매주 토요일밤에 열리는 레이스경주에 참가하기위해 그랜드 올 오프리 쇼에 오전공연을 요청할정도로 대단했었다.
1969년말에 마티 로빈스는 심한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1970년대 초에 대체동맥 수술을 받았었다. 의사들은 마티로빈스에게 쉴 것을 권고했지만 그는 곧 경주장 트랙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두 번째 그래미상을 안겨준 "My Woman, My Woman, My Wife"을 이 수술이 있기전 불과 몇주전에 녹음을 했다.
그 후 20년동안 콜럼비아 레코드와 함께 했으며 1972년에 MCA로 옮겨갔다. 그가 한쌍의 톱10 싱글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이 히트곡들은 시작에 불과했다. 1975년에 그는 콜럼비아로 돌아왔고 비록 레코드 판매량은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그의 첫 번째 두 개의 싱글인" "El Paso City" 와 "Among My Souvenirs"는 70년대말에 모두 1위를 석권했다.
1981년에 마티 로빈스는 자극이 적은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1년후 그의 이름이 컨츄리 명예의 전당에 오른지 불과 두달만에 그는 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두 번째 동맥 수술을 거치면서 살아 났지만 폐와 신장이 문제를 일으킨 잠시 후에 네쉬빌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