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5
1967년 7월, 팝계에서는 이때를 흔히들 '사랑의 여름'이라고 칭하지만, 미국의 디트로이트시에게는 '악몽의 여름'이었다. 자동차 공업도시인 이곳에서는 그때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디트로이트 경찰이 영업시간 외 음주를 죄목으로 흑인 민주 집회에 참여한 74명의 흑인을 연행한 것이 발단이 된 경천동지의 이 사태는 분노가 폭발한 수천 명의 흑인을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비롯한 1만6천명의 정부군이 동원되는 등 때아닌 전쟁을 방불케 했다. 총 2천2백92명의 사상자(42명 사망)를 냈고, 5천5백57명이 연행되어 수감됐다.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은 폭동 진압 후 “우리는 어떤 국가도 밟아서는 안되는 폭력과 비극의 일주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폭동은 진화되었지만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은 몇 개월 후인 1968년 4월 4일 터진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사건과 함께 흑인의 '급진적' 사회운동을 폭발시키는 뇌관의 역할을 했다. 흑인 무장 단체인 '블랙 팬더즈' 등 과격한 집단이 그 후 잇따라 결성되었고 대학생을 위시한 일부 양심적인 백인들도 흑인 운동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1968년 대학가에는 소요와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은 대중음악의 새로운 물결을 조성하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흑인 폭동을 계기로 흑인 음악인 소울(Soul)이 팝계의 전면에 부각되어 일련의 소울 스타들(제임스 브라운, 오티스 레딩, 윌슨 피켓, 아레사 프랭클린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 흑인의 긍지를 외쳤다. 록 음악은 샌프란시스코의 애스드록으로부터 영미(英美) 기타 영웅들의 귀를 째는 듯한 날카로운 기타 사운드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쟈니 윈터, 듀안 올맨 등 영미의 기타 플레이어들이 선사한 록 음악은 기본적으로 흑인 블루스였고, 이들로 인해 시카고 블루스의 거목들인 B.B 킹, 머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 그리고 존 리 후커 등이 부활해 재평가를 받았다. 경찰봉과 최루탄에 결연히 맞선 대학생들은 '피압박인종'인 흑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었다.
디트로이트 폭동의 저항정신과 파워가 실린 블루스 음악을 동시에 수렴한 그룹이 MC5였다. 지금은 거의 잊혀져버렸지만(우리나라에서는 록팬들도 존재를 거의 알지 못하는 무명이다) 이 시기의 록 음악 성격을 정의하는 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밴드다.
이 그룹은 바로 그 디트로이트가 배출한 그룹이었다. MC5는 'Motor City 5'의 약자로, '자동차 도시의 5인'이라는 뜻인데 자동차 도시는 디트로이트시의 별칭. 폭동이 발발한 1967년 그 해 롭 타이너, 웨인 크래머, 프레드 스미스, 마이클 데이비스, 데니스 톰슨 등 다섯 명의 디트로이트 고교동창생들이 의기 투합해 그룹을 조직했다.
디트로이트 폭동의 격렬함을 보존하려는 듯이 이 그룹은 오로지 '혁명'을 제창하기 위해 무대에 섰다. 혁명과 사회 변동에의 헌신이 이 그룹의 지향점이었다. MC5는 세상을 바꾸는 데 있어서 록 뮤직의 역할과 영향력을 신뢰했다. 이 그룹을 설명할 때 꼭 함께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다. 이들의 매니저이자 정신적 지주인 존 싱클레어이다. 그는 블랙 팬더즈와 상통하는 백인의 과격 운동단체 '화이트 팬더 파티'를 결성한 혁명적 투사였다.
싱클레어는 '목적적'인 록 밴드로서 MC5를 기획했다. 그는 “혁명이 개개인의 껍질을 벗고 서로 서로의 팔에 안기도록 추진하는데 전적으로 바치는 것이듯 MC5는 전적으로 혁명에 바치는 그룹”이라고 강변했다. 그들의 무대는 잔혹하고 악의적인 언어들로 가득찼다. 그들의 록 뮤직은 증오의 음악(Hate Music) 그 자체였다. 혁명을 부르짖는 게릴라들이 따로 없었다. 데뷔 당시부터 그들은 미국 국기를 몸에 두르고 모독 일새의 혁명적 구호를 외쳐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MC5가 수면위로 부상한 계기는 1968년 8월 시카고에서 개최된 민주당 전당대회였다. 대학가 데모가 절정에 달했던 이 무렵 반전과 인권 투쟁의 슬로건을 내건 대학생들은 이 대회장을 기존 정치에 대한 반대 시위의 집결지로 삼았다(이피의 리더 제리 루빈의 말 “시카고로 가자! 우리는 미래의 정치다!”). MC5도 싱클레어와 함께 시카고로 갔다. 그들은 그곳의 시위 군중들 앞에서 혁명의 신념을 주창하고, 사기진작을 위해 블루스 기조의 강력한 록 사운드를 연주,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모으며 일대 주목을 받았다.
MC5는 혁명, 선동 이외에 '모독'으로도 제도권과 세차게 충돌했다. 1969년에 선보인 데뷔 앨범 <고통을 걷어차라(Kick out the Jams)>의 타이틀 곡의 제목 뒤의 원조격인 컨츄리 조 앤 더 피시는 저리 가라였다. 이 때문에 음반을 출반한 일렉트라 레코드사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일부 레코드 소매상은 이 음반의 판매를 거부했다. 그러자 MC5는 대비책으로 지하신문을 통하여 앨범 광고를 때렸고, 음반을 거부했던 한 레코드 매장의 창문에 'Fuck You'라 휘갈겨 써붙이기도 했다.
그때 싱클레어는 마리화나 소지 및 복용죄로 체포돼 투옥되었다. 골치덩이 MC5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던 일렉트라사는 이를 빌미로 즉각 싱클레어와 그룹을 중도하차시켜버렸다. 매니저와 소속 레코드사를 졸지에 잃어버렸지만 '곤경' 속에서도 앨범이 차트 30위권에 진출한 것에 가능성을 본 어틀랜틱 레코드사가 그들과 계약을 체결, 1970년에 두 번째 음반인 <미국에 와서(Back in the USA)>를 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 헤비메틀의 고전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판매는 지극히 저조했고 차트 순위는 137위에 머물렀다. 참고로 이 음반을 프로듀스한 인물은 훗날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매니저가 된, 당시의 록 평론가 존 랜도였다. 이듬해 발표된 <하이 타임(High Time)> 역시 걸작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결과는 영점이었고 숫제 차트에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어틀랜틱사로부터 계약을 해제당한 이들은 새출발을 기하기 위해 영국으로 향했지만 멤버들의 탈퇴로 곧 해산되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제창은 그것으로 마감되었다.
MC5는 디트로이트의 정서에 걸맞게 귀를 째는 듯한 소음의 사운드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이념적 시각에서 혁명록 또는 게릴라록이라 불렸지만 사운드적으로는 '에너지록'으로 통했다. 리드 싱어 롭 타이너는 MC5의 사운드를 '전지에 전기가 입력되듯 자신들의 전기 에너지가 감상자의 감각기관을 충전한다'는 뜻에서 '재감각발생기'(Resensifier)라 명명한바 있다. 평론가들은 MC5를 당시 태동되고 있던 '헤비메틀의 원조'로 규정하기도 한다. 디트로이트 폭동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MC5를 위시해 '이기 앤 스투지스',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등 시끄러운 헤비메틀 밴드 상당사수가 디트로이트 출신이어서 디트로이트는 헤비메틀의 메카가 되었다.
MC5의 양날개 '시끄러운 사운드'와 '혁명적 메시지'는 1970년대 말 지축을 흔들었던 펑크록 밴드들이 재발국하여 기본틀화했다. 특히 혁명성이 강했던 섹스 피스톨즈, 클래시 등 영국의 펑크 밴드들이 MC5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섹스 피스톨즈가 훗날 굴지의 레코드사로부터 해제를 당하는 잇단 수난은 이미 MC5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밟은 것과 다름없어 새삼 역사의 반복성을 실감하게 한다. 1970년대 말의 펑크 폭풍으로 허공에 묻힐 뻔한 이 그룹의 이름이 다시 오르내리게 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그들의 앨범이 재발매되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평자는 '시대를 앞서갔다'는 의미에서 '1960년대에 활동한 최초의 1970년대 밴드'라 칭하고 있다.
MC5의 멤버들은 해산후 제각기 음악활동을 전개했지만(특히 펑크분야에서) 크게 주목받은 인물이 없다. 멤버 가운데 프레드 스미스는 1980년 여성펑크의 선두주자인 패티 스미스와 결혼, 패티가 언급될 경우 가끔 곁다리로 끼고 있고, 코카인소지로 옥살이를 한 바 있던 웨인 크래머가 최근 그룹 '워스 낫 워스'의 싱글에 연주자로 이름을 내민 정도.
록계는 혁명에 헌신한 전대미문의 그룹 MC5를 보유함으로써 역사의 한 페이지만은 '진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존재는 사라졌지만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 MC5가 록계에 남겨준 무형의 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