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ael Schenker Group (마이클 쉥커 그룹)
'플라잉 V 기타의 거장' 마이클 솅커는 1970-80년대를 통해 헤비메탈 지형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기타 연주자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의 재능은 가히 천부적이었다. 15살의 나이로 스콜피온스(Scorpions)의 리드 기타리스트로 가입했고, 3년 후에는 필 모그(Phil Mogg)가 함장으로 있던 영국 헤비메탈의 거함 유에프오(UFO)에 승선하여 1970년대에 이미 화려한 솔로가 지배하는 헤비메탈의 형식미를 완성했다.
유에프오 재적시 그가 'Doctor doctor', 'Rock bottom'등에서 들려준 핑거링은 팬들에게는 경악 그 자체였다. 1978년 앨범 <Obsession>을 마지막으로 그룹을 떠날 때까지 마이클은 다른 뮤지션들이 막 음악에 개안(開眼)할 나이인 20대 초반에 정상의 위치에 등극했다.
그는 정말 모든 것을 너무나도 빨리 일궈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밴드였다. 게스트로 참가했던 스콜피온스의 <Lovedrive>앨범작업을 마무리지은 후, 그는 마이클 솅커 그룹을 결성했다.
절정의 테크닉을 보여주는 기타리스트와 사이먼 필립스(Simon Phillips), 코지 파웰(Cozy Powell), 돈 에어리(Don Airey)와 같은 최고 실력파들의 결합은 단숨에 록 필드를 점령했다.
1980년 발표된 이들의 첫 작품은 영국 차트 8위에 오르며 이후로 수많은 록 기타 지망생들이 카피하게 되는 'Armed and ready', 'Cry for the nations', 'Into the arena', 'Lost horizons' 등의 명작들을 남겼다. 1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나온 2집 <MSG>역시 영국 차트 14위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들은 미국보다는 유럽과 유난히 헤비 사운드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일본에서 더 큰 지명도를 획득했다.
그룹의 '얼굴'인 마이클 솅커의 주가는 연일 상한가를 달렸고, 무명이었던 보컬리스트 게리 바든(Gary Barden) 또한 덩달아 인기가 상승했다. 1981년에 일본 부도칸에서 가진 공연 실황을 더블 LP로 만든 <One Night At Budokan>은 영국 5위를 기록해 그룹 역사상 가장 높은 상업적 성공을 기록했으며, 씬 리지(Thin Lizzy)의 <Live And Dangerous>, 마이클 자신이 연주했던 UFO의 <Strangers In The Night>와 함께 '라이브 앨범을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한 근본적 증거'라는 평을 들었다. 알카트라즈(Alcatrazz)와 레인보우(Rainbow)를 거친 베테랑 싱어 그레함 보닛(Graham Bonnet)을 맞아들여 공개한 1982년의 <Assault Attack>역시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레함이 유럽 투어중에 돌연 탈퇴를 선언해 버렸다(레인보우에 적을 담고 있을 때도 그는 리더 리치 블랙모어와 마찰을 일으키곤 했다). 이 위기 상황은 팀을 떠났던 게리 바든이 복귀하면서 극복됐다. 1983년 <Built To Destroy>와 이듬해 라이브 앨범 <Rock Will Never Die>를 발표하며 그룹은 안정 궤도에 진입했다.
이후 마이클은 밴드를 해산하고 3년간의 공백기를 갖는다. 그룹의 목소리는 로빈 맥컬리(Robin McAuley)가 담당하게 됐다. 그룹명도 맥컬리 솅커 그룹으로 전환된다(어쨌든 이니셜은 같다). 이들은 좀더 대중적 전략을 취한 앨범들을 발표했고, 1993년에는 3인조 편성으로 일렉트릭 사운드를 전면 배제한 어쿠스틱 앨범 <Unplugged Live>를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마이클 솅커 그룹은 유에프오와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가 이룩한 브리티시 헤비메탈의 원형을 좀더 섬세한 터치로 가공해 정교화했다. 서정성을 중시한 멜로디 라인을 강조, 헤비메탈 사운드 미학의 지평을 확대한 것도 그들의 빼놓을 수 없는 공로이다. 선율에 잘 매료되는 동양권 팬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