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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2-27 19:19
Moody Blues (무디 블루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59  



Moody Blues (무디 블루스)

 

 
'Night in white satin', 'Melancholy man', 'For my lady', 'Your wildest dream' 같은 곡들로 국내 팝 팬들에게 친숙한 무디 블루스(Moody Blues)는 올해로 38년의 활동경력을 맞이하는 최고(最古)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이다. 이들은 1967년에 클래식과 록을 접목시킨<Days of Future Passed>로 프로그레시브 록의 기틀을 확립했으며, 미국에서만 2장의 넘버원 앨범과 14장의 골드 및 플래티넘 음반을 보유해 가장 성공한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들은 음악 주제는 다양했다. <In Search Of The Lost Chord>에서는 인도의 요가철학을 담았고, <On The Threshold Of A Dream>은 꿈을 소재로 한 환상적인 작품세계를 펼쳐 보였다. 또 아마추어 천문가였던 그룹의 멤버들은 1969년 인류의 달 정복을 영감으로 한 <To Our Children's Children's Children>을 구상했고, <Question Of Balance>는 전쟁, 공해, 남녀문제, 소외 등 현실적인 주제를 작품화했다.

이렇듯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했지만 무디 블루스는 항상 아트 록의 변방에 자리한다.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를 언급할 때도 무디 블루스는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킹 크림슨(King Crimson), 에머슨, 레이크 & 파머(Emerson, Lake & Palmer), 예스(Yes), 제네시스(Genesis)의 뒤에 위치한다. 가사의 메시지, 컨셉트 형식의 음반, 그리고 플룻과 멜로트론을 도입한 악기구성은 '진보적' 이었지만 그 음악 바탕에는 언제나 포크와 R&B를 중심으로 한 팝록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즉, 예스나 에머슨, 레이크 & 파머처럼 화려한 테크닉을 갖지도 못했고, 킹 크림슨과 핑크 플로이드처럼 팝음악의 형식을 뛰어넘는 파격을 선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음악적인 실험과 자신들만의 색깔을 구현했다는 점, 그리고 대중성과 작품성을 적절히 조율해 일반 대중들과 아트 록 사이의 교량 역할을 했다는 점은 평가받아야 한다.

이들의 역사는 비틀즈의 열풍이 일던 1964년, 영국의 공업도시 버밍엄에서 시작되었다. 마이클 파인더(키보드), 레이 토마스(Ray Thomas/ 플룻, 색소폰)를 주축으로 훗날 폴 메카트니 & 윙즈(Paul McCartney & Wings)의 멤버가 되는 데니 레인(Denny Laine/기타, 보컬), 그레엄 에지(Graeme Edge/드럼), 클린트 워윅(Clint Warwick/베이스, 보컬)의 다섯 젊은이들이 음악으로 뭉친 것이 무디 블루스의 시작이다.

런던의 유명한 마키 클럽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치고 데카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이들은 배시 뱅크스(Bessie Banks)의 곡을 리메이크 한 R&B풍의 싱글 'Go now'를 영국 차트 1위(미국 10위)에 랭크시키는 성공을 일궈냈다. 그러나 1965년의 데뷔 앨범은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클린드 워윅과 핵심 멤버였던 데니 레인이 그룹에서 탈퇴하면서 무디 블루스는 위기를 맞이했지만, 저스틴 헤이워드(기타, 보컬)와 존 로지(John Lodge/베이스, 보컬)를 영입해 1967년에 명반 <Days Of Future Passed>를 제작했다.

R&B의 그림자가 짙은 브리티시 인베이션 밴드 스타일이었던 데뷔 앨범에 비해서 2집 <Days Of Future Passed>는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을 모티브로 구성해 클래식과 록음악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킨 최초의 작품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을 언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걸작이다. 이 음반은 록과 클래식의 융합이라는 점 외에도 앨범 전체의 곡들이 일관된 주제와 메인 테마를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와 함께 컨셉트 앨범의 서막을 열었다. 저스틴 헤이워드와 존 로지는 무디 블루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1967년부터 1972년까지는 무디 블루스의 전성기로, 이 시기에 발표된 <In Search Of The Lost Chord>(미국 23위, 영국 5위), <On The Threshold Of A Dream>(미국 20위, 영국1위), <To Our Children's Children's Children>(미국2위, 영국 13위), <Question Of Balance>(미국 3위, 영국 1위), <Every Good Boy Deserves Favour>(미국2위, 영국1위), <Seventh Sojourn>(미국 1위, 영국5위)은 음악팬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반들인 동시에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이 작품들은 완성도나 창작력에 있어서도 정점을 이루었다. 이 LP들에서 'House of four doors', 'Never comes the day(91위)', 'Tuesday afternoon(24위), 'Ride my see-saw(61위)' 'Question(21위)', 'I'm just a singer (In a rock and roll band - 12위), 'Melancholy man', 'The story in your eyes(23위)', 'For my lady'등의 명곡들이 배출되었고, 'Night in white satin'은 1972년에 다시 발표되어 미국에서 2위를 기록했다.

장기간의 투어를 끝낸 무디 블루스가 5년의 긴 겨울잠을 자는 사이 음악계의 대기는 변했다. 무디 블루스는 5년만인 1977년에 신곡이 포함된 라이브 음반 <Caught Live + 5>로 컴백했지만 디스코 열풍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다. 경쾌한 분위기로 변화를 꾀한 1978년의 <Octave>(미국 13위, 영국6위)는 전작의 실패를 어느 정도 만회했지만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뚜렷한 하향세였다.

그러나 이들은 1981년에 <Long Distance Voyager>를 발표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뉴웨이브 스타일을 받아들여 매니아들에게 충격을 가한 'Gemini dream(12위)'과 'The voices(15위)가 싱글차트를 강타하는 사이 이 앨범은 미국에서 1위(영국 7위)를 차지했다. 예스 출신의 패트릭 모라즈(Patrick Moraz)를 건반주자로 배치시키고, 오랜 프로듀서였던 토니 클락(Tony Clarke)을 핍 윌리암스(Pip Williams)로 교체한 구조조정의 결실이었다. 이로써 무디 블루스는 예스, 제네시스와 함께 1980년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대열에 합류했다.

이후에 공개한 1983년의 <The Present>(미국26위, 영국15위),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Your wildest dream(9위)'이 수록된 1986년의 <The Other Side Of Life>(미국9위, 영국 24위), 마지막 싱글 히트곡 'I know you're out there somewhere(30위)'가 있는 1988년의 <Sur La Mer>(미국 38위, 영국21위), 1991년의 <Keys Of The Kingdom>(미국 94위, 영국 54위) 등은 이들의 창작력이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올림픽에 참여하는 선수들의 목표가 메달 획득만이 아닌 것처럼 상업적인 실패가 이들의 길을 가로막진 못했다. 99년에 <Strange Times>와 2000의 <Live At The Royal Albert Hall 2000>을 발표하며 화려하진 않지만 진지한 활동으로 노익장을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