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k Drake (닉 드레이크)
영국 포크계의 주요인물인 닉 드레이크는 캠브리지 재학시절 페어포트 컨벤션(Fairport Convention)의 눈에 띄어 데뷔한 인물이다.
1948년 6월 19일 미얀마에서 태어난 닉은 두살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선천적인 운동능력을 과시하며 주위의 관심을 받지만 그 자신은 운동보다 음악에 더 매력을 느꼈다. 캠브리지에 입학한 그는 랜디 뉴먼, 팀 버클리, 밴 모리슨을 들으면서 음악적 영감을 더욱 넓혀 갔다. 그의 청량한 어쿠스틱 기타는 신비로움 자체였으며 목소리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감지한 듯 우수에 젖어 있었다.
캠브리지 대학의 무도회에서 노래를 부르던 닉을 본 애쉴리 허친스는 그에게 프로듀서 조보이드를 소개시켜 준다. 조는 닉의 노래에 엄청난 매력을 느끼게 되어 곧 그와 계약을 맺고 데뷔앨범 [Five LeavesLeft] 의 제작에 착수했다. 그러나 제작 과정에서 열 다섯부분의 오케스트라 편곡을 위해 참여한 지명도 있는 편곡자에게 화가 나있던 닉은 결국 그를 내보내고 공석이 되어버린 오케스트라 편곡에 고향 친구이자 스튜디오 기술자인 로버트 커비(Robert Kirby)를 영입한다. 놀라운 재능을 보여준 젊은 음악인들의 성숙한 감각으로 1968년 [Five Leaves Left]가 공개된다. 날아갈 정도로 부드럽고, 감정과 서정성의 이상적인 곡선을 그리기에 충분히 감각적인 닉의 목소리와 기타는 앨범의 내용을 더욱 알차게 해주었다. 특히 부분적인 첼로와 베이스를 전체적인 현악 편곡위에 편승시킨 점은 록 일변도로 흐르던 당시의 음악계에 하나의 충격이었다.
수록곡중 'Day Is Done'은 포크음악이 들려줄 수 있는 최대의 감성을 전달해 주고 있는 곡이다. 닉의 두번째 앨범 [Bryter Layter]가 발표된 것은 그가 졸업을 1년 남겨두고 캠브리지를 중퇴한 몇 달후였다. 2집은 1집과는 전혀 다른 듯 하면서도 모호한 동질성을 느끼게 해주는 앨범이다. 대부분의 곡에서 악기 편곡은 경쾌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더욱 고조된 슬픔을 가리고자하는 한 차원 높은 방법이었다. 닉의 프로듀서 조 보이드와 엔지니어 존 우드는 2집이 그들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하지만 닉의 음악을 듣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고 2집 역시 판매실적은 저조했다. 닉은 심한 갈등에 싸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데뷔이후 언제나 동반자로 지내오던 조 보이드가 그를 떠나자 닉의 갈등은 우울증의 정신병적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가 이런 고난을 딛고 3집 [Pink Moon]을 제작한 것은 기적적인 변화였다. 3집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앨범이었다. 특히 그의 기타연주와 보기드문 오버더빙 피아노 액센트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반주도 없이 만들어진 이 앨범은 감각적으로 조숙할대로 조숙한 최상의 예술혼이 표출된 걸작이었다. [Pink Moon]을 제작한 후 닉의 병세는 악화된다. 녹내장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자주 공포에 떨었고 조용히 요양하면서 정신과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가 생애 최후의 4곡을 녹음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
하지만 1974년 11월 25일 닉 드레이크는 불과 26세의 나이로 자신의 침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때 그의 책상에는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 복사본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침대에는 트립티졸(Tryptizol)이라는 흥분제의 약병이 뒹굴고 있었다. 그렇게 자살인지 병사인지 알 수 없는 미스테리만을 남긴 채 닉 드레이크는 팬들 곁을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