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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05 21:47
Neneh Cherry (네네 체리)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40  


Neneh Cherry (네네 체리)

 

 
체리가(家)의 가족들은 훌륭했고 그 과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아버지 돈 체리(Don Cherry)는 50년대부터 활동한 유명 재즈 뮤지션이었고, 이 글의 히로인 네네 체리(Neneh Cherry)의 이복 동생 이글 아이 체리(Eagle Eye Cherry)는 1998년 'Save tonight'으로 차세대에 가장 유망한 싱어 송라이터의 대열에 합류했다('Play that funky music'의 펑크(Funk) 디스코 그룹 와일드 체리(Wild Cherry)는 체리 가족들과는 무관).

1989년 네네 체리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 팝음악계는 한계점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틀에 박히고 상업적인 팝이 전 세계를 뒤덮었으며 저항의 상징인 록음악의 한 지류이자 가장 시끄러운 음악인 헤비메탈마저도 젤리처럼 말랑말랑했고 보여주기에 급급했다. 물론 그 지하의 세계에서는 하드코어 펑크와 포크가 이러한 세태에 끊임없이 분노하며 대폭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1964년 3월 10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네네 체리는 10대때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브리티시 펑크와 펑크(Funk) 음악으로부터 반골 사상의 세례를 받고 이러한 기성 세대에 대한 분노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1989년에 출시한 데뷔작 <Raw Like Sushi>는 팝과 록, 힙 합, 댄스를 하나의 대형 솥에 넣고 끓여 자신만의 스타일을 우려냈다. 당시의 상업적인 대중 음악에 대한 얼터너티브였다. 이 앨범에서는 'Buffalo stance(3위)'와 'Kisses on the wind(8위)가 연타석 안타를 날리면서 대중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이 음반은 댄스팝과 리듬 앤 블루스뿐만 아니라 테크노와 트립합에 대해서도 채권자의 위치에 서 있다.

얼터너티브의 물결이 전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가던 1992년, 두 번째 앨범 <Homebrew>를 발표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행보에 관심을 보였다. 얼터너티브의 시조 격인 밴드 REM의 보컬리스트 마이클 스타이프(Michael Stipe)도 초대 손님으로 참가한 이 LP는 전작에 비해 록적인 필이 두드러졌으나 판매고는 예상치를 훨씬 밑돌았다.

그러나 레코드 매장에서 자신의 음반이 얼마나 나갔는지를 알려주는 수치가 그녀의 소포모어 징크스를 의미하진 않았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전 음반에 비해서 확실히 사회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물질 만능주의를 꼬집은 'Money love'와 가난과 약물의 상관 관계를 빗대어 흑인들의 삶을 묘사한 'I ain't gone under yet' 등의 트랙들로부터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눈에 비친 미국 사회의 모순과 그것에 대한 격분이다. 1996년에 마지막 정식 음반 <Man>이 나왔지만 전작들 만한 주목을 받진 못했다.

네네 체리의 음악은 그녀의 이름 '체리'처럼 달콤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톡 쏘는 음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