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a Cole (폴라 콜)
가창력 없이 예쁘거나 귀여운 목소리로 일관하는, 아니면 단지 보컬만 잘 다듬어졌을 뿐 음악적 재능은 뛰어나지 못한 이들…? 이렇게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으리라 생각된다(믿고싶다). 하지만 아직도 알게모르게 이러한 편견들이 조금씩 숨어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편견들을 점점 무너뜨리고 있는 여성 아티스트들 중에 폴라 콜이 서있다.
여성보컬리스트이자, 송라이터, 프로듀서 일까지 도맡아하는 폴라 콜. 그녀가 훌륭해 보이는 것은 이 세가지 일을 혼자서, 그것도 잘 해내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은 팝시장을 향한 대중적인 성향이 짙음에도 불구하고 개성이 짙게 깔려있다. 그녀는 사라 맥라클란(Sarah McLachlan)과 토리 에이모스(Tori Amos)의 영묘하고 아름다운 사운드에 영향을 받은 듯 꿈같은 멜로디와 시, 내성적인 경향의 가사들에 의존하는 곡들을 만들어왔다. 그녀의 솔직함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적인 감성은 케이트 부쉬와 시네이드 오코너와 비교되기도 하고, 보컬톤에 있어서 앨라니스 모리세트적인 충실함과 사라 멕라클란의 맬로디적 감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폴라 콜(Paula Cole)은 1968년 4월 5일 작은 매사추세츠 타운의 락포트에서 태어나 소녀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폴라는 자신의 앨범 곳곳에서 락포트와 그때 시절을 노래하는데 그곳에 대한 기억은 항상 음울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그녀를 붙들어 놓는 듯하다.
데뷔앨범 [Harbinger]의 수록곡인 'Bethlehem'은 "No star above my Bethlehem, I want to be dog I want to be a rock, I don't want to be me"라는 가사로 가난하고 자신감 없었던 내성적인 어린 시절에 대한 내용을 솔직하게 담고있다. 두번째 앨범인 [This Fire]에서도 역시 그 시절을 못잊고 있는데, 'Tiger'라는 곡에도 역시 그 벗어나고 싶었던 베들레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I've left Bethlehem and I feel free. I've left the girl I was supposed to be." 하지만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한건 음악적인 환경에 싸여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녀는 아마추어 뮤지션이었던 아버지와 비쥬얼 아티스트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특히 폴카밴드에서 일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녀는 그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의 아버지는 폴카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곤 하였다. 그는 두 아이를 위해 음악 연주뿐 아니라 다른 파트타임 일들을 하면서도 자신은 대학에서 공부를 할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았다. 그가 무대에서 기타를 연주하면 나는 종종 즉흥 보컬로 참여하곤 했다. 그들은 나에게 '음악은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라는 가장 소중한 삶의 철학을 알려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레코드를 듣거나 라디오를 듣는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지금에 와서 내가 메인스트림 사회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생각하면 행복해진다."
그녀는 가족들의 많은 기대를 받으며 고등학교 시절을 올 A학점으로 일관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우기 위해 버클리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재즈 싱잉과 즉흥곡을 배웠다. "많은 올드 스탠다드 곡들과 어레인지, 그룹송 등 지적으로 많은 음악을 배워왔다."라는 그녀의 말처럼 폴라 콜은 탄탄한 음악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글을 써서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그녀가 선택한 길은 솔직한 내면의 가사들을 담은 싱어 송라이터였다. 앨범에서 그녀는 수줍음 많고 자아의식이 강한 과거의 기억들을 풀어놓으며 어떠한 자유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첫 데뷔로 볼 수 있는 것은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이 그의 1992∼93 월드투어에 그녀를 초대했을 때이다. 그는 그녀안에 내재해있는 끼와 솔직한 열정을 이미 감지하였다. 그리고 곧 그녀는 이마고(Imago) 레코드에 사인하고 프로듀서 케빈 킬런(Kevin Killen)을 맞아들여 94년 첫 데뷔앨범인 [Harbinger]를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1년이 채 되기 전 이 레코드회사가 비즈니스를 끝내는 터에 앨범이 라디오나 일반에 노출되지 못하다가 95년 워너와 계약을 맺은 후 그해 가을 [Harbinger]는 다시 이슈화되었다. 그리고 96년 10월, 2번째 앨범 [This Fire]를 발표하였는데 이 앨범은 폴라 콜에 의해 직접 프로듀싱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앨범이었다. 앨범 수록곡 중 'Where Have All the Cowboys Gone?'은 97년 봄 크게 히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폴라 콜의 능력과 카리스마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리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바로 "릴리스 페어(Lilith Fair)" 투어 공연이었다. 97년 여름 캐나다 밴쿠버 출신의 여성뮤지션인 사라 맥라클란이 주축이 되어 이끌어진 이 공연은 모두 알다시피 남성들이 아닌 순수한 여성뮤지션들만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행사로 약 50일간에 걸친 대장정에 들어갔다. 맥라클란은 물론 쥬얼, 셰릴 크로우, 조안 오스본, 트레이시 채프먼 등 수많은 여성 뮤지션들의 재능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바로 "릴리스 페어" 공연이다. 사라 맥라클란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폴라 콜을 직접 찾아가 이 투어에 참가토록 권유하였다 한다. 그리고 폴라 콜은 이 무대에서 평소 약점이었던 수줍음을 모두 떨쳐버린 채 카리스마적인 무대를 보여주었다. 이후 그녀는 유명잡지의 기사 주제가 되기도 하는 등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고 두개의 히트싱글 'Where Have All The Cowboys Gone?'과 'I Don't Want To Wait'에 힘입어 앨범 [This Fire]는 팝차트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98년 그래미는 그녀를 '올해의 프로듀서'를 포함, 7개 부분에 노미네이트시켰다. 그리고 94년 데뷔앨범을 냈으므로 자격 미달임에도 불구하고 폴라 콜은 시상식에서 '최고의 신인 아티스트'상을 거머쥐며 그래미 역사상 이례적인 사례를 남겼다. 당시 뉴욕 타임즈는 그녀를 '굉장한 예술적 잠재력을 지닌 떠오르는 인재'라며 극찬하였다.
폴라 콜의 이러한 행보는 "릴리스 페어"의 역할과 소극성에서 탈피한 폴라 자신의 노력 끝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폴라는 말한다. "이 앨범은 나 자신의 개화기였다. 나는 첫 앨범인 [Harbinger]를 돌아보았고 거기서 어떠한 신랄하고 솔직한 면과 젊고 어린 관점들을 읽었다. 그리고 지금 꽃은 활짝 피었다. 태양이 있고 두려움은 없다. 나는 더 많은 기회들을 얻을 것이다. 나는 대담하고 자부심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