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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06 11:58
Premiata Forneria Marconi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34  


Premiata Forneria Marconi

 

 

Italian Progessive Rock 그룹중에 음악사적으로 우리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그룹이 있다. 바로 Premiata Forneria Marconi라는 그룹이다.
10년전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그들을 우리들은 이름이 무척 길기 때문에 단순히 앞글자만을 떼어 P.F.M이라고 불러왔는데, 국내 방송에서는 그들의 영어로 된 가사 때문인지 아니면, 영.미국적인 음악적 요소를 품고 있기 때문인지 당시 유행하던 Pop-Rock음악처럼 그들의 음악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국내에서는 대표적인 “The World Became The World”와 “Per Un Amico”가 성곡했지만 그이후에도 그들의 많은 작품들이 수입앨범으로 소개되면서, 이젠 방송이 아니라 직접 그들의 작품들을 구석구석까지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Premiata Forneria marconis 는 매우 길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룹명과 함께 이태리 본국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가장 성공한 Italian Group이다. 이 지면에서 소개되고 앞으로 소개되어질 그룹들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큰 명성을 얻었던 수퍼그룹중에 수퍼그룹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오랜역사가 보여주듯 그만큼 많은 앨범ㅇ르 발표했고, 그와 더불어 다수의 유능한 뮤지션들이 이그룹을 스쳐 지나갔다. 무대데뷔와 데뷔앨범 한장으로 당시 외국음악 숭배에 급급하던 이태리의 음악시작을 깊은 잠으로부터 깨어나게 만들었던 Premiata Forneria Marconi !
외국의 연주자들과 경쟁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실력을 지녔기 때문에  그들은 음악계에 등장하자마자 자국의 대중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그들의 실력정도라면 능히 Rock의 종주국이라고 부리우는 영.미국시장 진출도 가능하리라 여겨졌다. 사실 이 조그만 지면에서 그들의 앨범에 수록되었던 수많은 곡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무리일 것이다. 또한 그들의 역사를 자세히 소개한다는 것 역시 이렇게 할당된 지면을 통해서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들의 유명 세만큼 주위에서 소화해 내기 어려울 정도의 방대한 자료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드시 밣혀 두어야 할 것은 여러분들이 앞으로 보게될 그들의 역사와 사진자료들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Premiata Forneria Marconi 의 모체가 되는 Quelli 라는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이었다. Quelli 는 미쉘 폴라레프(Michel Polnareff)의 히트곡인 <La Poupee Qui Fait Non>을 이태리어로 번안한 <La Bambolina Che No, No,No>라는 곡으로 1967년 첫번째의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이 영국 그룹들인 Who나 Them처럼 지시대명사를 그룹명으로 내세운 것은 하나의 상술로서 여겨졌고 그들이 행하는 음악 역시 영.미국의 음악을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Quelli는 대부분의 비트 그룹처럼 영.미국의 히트곡을 이태리어로 번안하여 부르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미쉘 폴라레프에 이어 Turtles의 최고 히트곡인 <Happy Together>, Traffic의 <Hole In My Shoe>, Nice의 <The Thoughts Of Emerlist Davi jack>에 이르기까지 영.미국의 히트곡들을 번안했고, Tommy Roe의 <Dizzy>와 Fruitgum Co.의 <1,2,3>emd 보다 상업적인 Bubble Gum류의 작품들ㅇ르 리바이벌 시켰다. 또한 Tremelos의 <Even The Bad Times Are Good>을 <Questa Citta Senza>로 그리고 Aphrodite’s Child의 <Rain And Tears>를 <Lacrime E Pioggia>등의 이탈리아곡을 번안하기도 했다. 물론 외국곡 이외에도 많으 ㄴ이태리곡들도 발표했는데 유명한 작곡 작사가들의 작품들을 받거나 아니면 리바이벌이라는 차원에서 다른 이태리 그룹이나 가수들의 작품들을 연주하기도 했다. Quelli는 이태리 beat계의 양대산맥으로 불리우는 두 그룹 I Rokes와 Equip 84의 과대한 세력다툼속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대중들의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그후 그들은 이태리 대중 음악계의 산실이라고 불리우는 Sanremo Festival에 참가하면서 멤버를 증강 시키는 노력을 보이지만 음악적 갈등으로 결국 해산의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Beat계는 붕괴되고 있었다. Quelli의 멤버들 중에는 우리들과 친숙해져 있는 Alberto Radius라는 인물이 있었다. 로마태생의 그는 후에 Formula 3를 결성했고 Il Volo라는 그룹도 이끌었던 유능한 기타 리스트이며 보컬리스트로서 Simon & Pennies라는 영국 그룹에서 활약하다가 군복무로 인하여 그룹을 떠나게 되는 Franco Mussida의 후임으로 Quelli에 참가했었다.
그룹이 공식적으로 해산된 후 드러머인 Franz Di Cioccio는 새롭게 출발하는 Nuova Equipe 84에 참가했고 Yochi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던 Franco Mussida와 다른멤벋르은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그룹인 King Crimson, Genesis, Yes, Jethro Tull 그리고 Van Der Graaf Generator등의 음악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네명의 멤버들은 이러한 음악을 소화해 내기 위하여, 새로운 그룹을 결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연주자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때 발탁된 인물이 당시 플룻과 피콜로를 배우고 있었던 Mauro Pagani라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그는 비올라도 능숙한 다중악기주자로서 그동안 Blues Rock그룹들과 함께 활약하고 있었다.
5인조 그룹으로서 새롭게 탄생한 그들은 뚜렷한 그룹명 없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커다란 공연을 앞두고 그들은 새로운 그룹명을 반드시 찾아내야만 했다. 이 점에서 우연히 제시된 그룹명은 Bresciano의 작은 마을에 있는 빵집 이름인 “Pasticceria Marconi”였다. 그후 이 그룹명은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다시한번 바뀌게 된다.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는 많은 그룹들이 뜻을 알수 없는 긴 그룹명을 내걸고 활동하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퍼지고 있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5중주는 길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Premiata Forneria Marconi를 그룹명으로 채택하게 된 것이다. 그룹이 결성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에게 두개의 행운이 뒤따랐는데, 그 첫번째가 유능한 매니저 Franco Mamone가 그들의 공연 매니저가 되어 주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Lucio Batisti와 mogol에 의해서 주도되는 신흥 레코드 회사 NUmero Uno와의 계약이 이루어 진 것이다. Franco Mamone에 의해서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Deep Purple, Procol Harum, Yes 그리고 Black Widow등의 오프닝 밴드로서 활약할수 잇었는데, 이러한 무대를 통해서 그들의 실력이 대중들에게 노출되었다. Premiata Forneria Marconi가 King Crimson의 대표작인 <21st Century Schizoid Man>과 같은 고전들을 무대에서 올렸을 때 대부분의 청중들은 외국 그룹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그들의 실력을 인정했다. 단지 소수의 청중들만이 그들의 표절과 모방을 나무랐을 뿐이다.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소소의 비난자들을 위하여 앞으로 그들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들려주리라 다짐하면서 무대를 내려왔다. 그후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남의 곡이 아닌 그들의 작품을 완성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Viareggio에서 개최된 제 1회 전위예술 훼스티벌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무대위의 그들의 대표곡이며 첫 작품인 <Impressioni Di Settembre>가 연주되었을 때 모든 청중들은 그 음악에 사로잡혔다. 그후 이곡은 그들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청중들로부터 항상 앵콜을 받거나 요청되는 명곡이 되어 버렸다. 가사는 노련한 작사가 Mogol에 의해 쓰여졌고, 이 곡에서부터 부각되고 있는 악기는 synthesizer로 당시 Progressive Rock 붐에 편승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어린이들 TV프로그램에도 그들의 음악이 소개되고,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데뷔 앨범의 발매를 서두르게 된다. 1972년초 그들의 데뷔앨범 (Storia Di Un Minuto)가 레코드 상점의 진열장에 놓이자 음악 평론가들과 음악 애호가들은 그들이 Italian Rock을 이끌어갈 새로운 주역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Banco Del Mutuo Soccorso, 니콜리의 Osanna, 제노바의 Delirium과 New Trolls에 이어 밀라노에도 수퍼그룹이 탄생한 것이다. 1972년은 한마디로 Premiata Forneria Marconi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데뷔애럼에 이어서 두번째 앨범 <Per Un Amico>가 발표되자마자 이태리 음악 시장은 눈에 띄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태리의 대중들은 자국의 음반을 등안시하고 영.미국의 음반을 선호했는데 이러한 현상이 정반대의 상황으로 돌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1년동안 Premiata Forneria Marconi의 데뷔앨범과 두번째 앨범의 판매고는 50만장을 넘어섰다. 공연무대에서도 그들은 이태리 색채가 짙은 연주와 진지한 연주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Mauro pagani는 무대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잘생긴 용모와 정열적인 연주로 가장 인기를 모았으며 Jethro Tull의 Ian Anderson과 Curved Air의 Darryl Way 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 내었다.

 

 

영국으로의 진출


여러 무대 경험으로부터 얻은 그들의 명성은 곧 록의 종주국인 영국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을 영국에 알렸던 대표적인 인물은 King Crimson의 작사가 Pete Sinfield였다. 그는 Emerson Lake & Palmer의 이태리 순회공연에 동행하면서 Premiata Forneria Marconi라는 그룹의 두번째 앨범 (Per Un Amico)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영국시장 진출을 위하여 신흥 레코드사인 Manticore사의 계약하도록 주선했고, 두번째 앨범의 English Version을 위하여 그가 직접 영어가사를 작사해주었다. 그의 작사는 이태리 원어보다 더 초현실적이었다. 그들의 영국 공연이 이루어졌고 주간 음악 전문지 Melody Maker지와 New Musical Express지는 영국에 상륙한 이태리 그룹에 대하여 “영원히 남을 이태리 그룹 PFM”이라는 타이틀 아래 인터뷰와 논평을 실었다. 그들의 두번째 앨범 (Per Un Amico)에 대한 영어판 (Photo Of Ghost)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1973년은 Premiata Forneria Marconi가 영국시장에서 빛을 발하던 한해였다. 그들의 두번째 순회공연이 Ten Years After와 함께 이루어진다. 그들의 이름은 영국의 음악지와 방송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본국인 이태리에서도 그들의 위치는 확고하게 자리가 잡힌다. 그들은 숨많은 Jam Session을 통하여 연주력과 즉흥성을 향상시켰고 새벽에는 새로운 곡들을 창작하는데 전념했다.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Rimani에 있는 Altro Mondo라는 클럽에서 Banco, Area, Osanna, Alan Sorrenti, Alberto Radius등과 함께 정규적으로 연주를 가졌다. 그들은 당대의 여러 수퍼 아티스트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Area에서 베이스주자로 활약하던 Patrick Djivas와 절친해진다. Partrick Djiva는 그리이스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했으며 이름ㅇ르 편리하도록 Djivas에서 Zivas로 수정했다.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그를 그룹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였다. 그의 참가후 런던에서 녹음되었던 새로운 앨범 (L’isola Di Niente)가 발표되었다.

 

 

미대륙 상륙


미국시장은 유럽의 뮤지션들에게는 커다란 시장이다. 미국시장에서의 성공은 곧 국제적인 성공을 의미한다. 가장 큰 이익을 보장해주는 확실한 세계 제1의 시장이다. Pete Sinfield는 미대륙에 진출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로서 (L’isola Di Niente)의 영어 번역판을 준비했다. (L’isola Di Niente)는 균형과 조화가 완벽한 리듬과 멜로디를 담고있는 Premiata Forneria Marconi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앨범은 Pete Sinfield에 의해서 (The World Became The World)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변형되어 소개되었다.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이 앨범과 함께 캐나다 순회공연을 준비했다. 다른 이태리 그룹처럼 정치적 메시지나 안일한 슬로건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복잡한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미대륙 진출도 수월했고 아무런 제약없이 유명한 무대위에서 2년간의 성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자동차 경기장 Charlotte에서 150만의 관중을 모아놓구 Emerson Lake & Palmer, Egales 그리고 Allman Brother’s Band등과 공연했고 Santana, J. Geils Band, Beach Boys, Poco, peter Frampton 그리고 Frank Zappa와 도 공연했다. 미국의 언론은 Premiata Forneria Marconi를 소피아 로렌, 야채와 태양, Pizza 그리고 Spaghetti Rock의 이미지로 소개했으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그룹명에 대한 이야기로서 지면의 대부분을 낭비했다. 아무튼 그들의 앨범은 100만장 이라는 판매고와 함께 미국의 Top 200차트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대륙에서의 오랜 체류로 인하여 그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 여러가지 곤경에 처하게 된다. 고국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집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다른 그룹들과의 치열한 경쟁, 악기를 훔쳐가는 도둑들, 피곤한 여행 그리고 타락한 음악가들과의 만남에 그들은 지쳐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영국의 Reading Festival과 스위스의 Montreux Festival에도 참가했다. 이태리로 돌아온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예전보다 스케일이 큰 공연을 치루었는데 보강된 조명장치와 거대한 쇼들이 그들의 세계적인 대성공을 그대로 투영시키고 있었다. 이때 1974년 8월에 New York과 Toronto에서 녹음된 라이브 앨범 (Cook)이 미국에서 발매되었다. 박진감과 기교 넘치는 Rossini의 ‘윌리엄 텔’서곡을 변형시킨 <Alta Loma Five Till Nine>과 같은 새로운 곡이 생생하게 이 앨범에 담겨있다.
1975년은 Premiata Forneria Marconi에 있어 음악적 소재의 결핍과 더불어 코벌리스트의 부재에 대한 위기가 돌출되었던 한해였다. 그들이 유명해진 만큼 그들의 성공작에 이을 후속타가 터지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유능한 보컬리스트가 없었다. Franz Di Cioccio와 Franco Mussida 그리고 Fiavio Premoli는 그들에게 맞는 보컬리스트를 찾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결국 이태리의 peter Gabriel이라고 불리웠던 Acqua Fragile출신의 보컬리스트 Bernard lanzetti가 그룹에 합류하게 된다 그는 Parma 출신으로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따라서 그가 참가한 통산 7번째 앨범 (Chocolate Kings)가 영어가사로 쉽게 이루어 졌다. 이 앨범에서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Genesis를 적지않게 모방하고 있다. 초콜렛ㅇ르 먹고 기형적으로 뚱뚱해진 마릴린몬로의 사진을 커버로 대형포스터까지 삽입하고 있는 앨범이다. 이 앨범 커버는 후에 문제가 되어 다른커버로 교체되기도 했다.
이 앨범에는 미국을 비꼬는 정치, 사회적 풍자를 담고 있는데, 개인주의와 많은 퇴폐속에서 마릴린 몬로를 상징하는 금발과 백치, 그것에 모든 것을 소비하고 불태우는 위대한 나라로서 미국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공연으로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유럽, 미대륙뿐만 아니라 동양까지도 진출했던 유일한 이태리 그룹이 되었고 본국 이태리 남부도시 순회공연 및 영국 런던의 Royal Albert Hall로부터 영국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영국 순회공연이 끝날무렵 그룹의 불꽃과도 같은 존재였던 Mauro Pagani는 그동안의 무리한 세계공연에 지쳐있었고 그룹 탈퇴를 선언했다. 그는 Premiata Forneria Marconi의 다른 멤버들이 새로운 앨범 (Jet-Lag)를 녹음하기 위하여 California로 떠낫을 때 그는 그의 고향인 밀라노로 되돌아왔다. 그는 솔로활동을 시작했고 그가 원햇었던 음악 교사로서의 일과 희곡을 쓰는 일들을 병행했다. 앨범(Chocolate Kings)부터 변모하기 시작한 Premiata Forneria Marconi의 음악 스타일은 Franz Di Cioccio의 새로운 음악 지향에 의해서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는 당시 Jazz Rock에 심취해 있었으며 새로운 앨범 (Jet-Lag)에는 그의 음악적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앨범부터 Mauro Pagani의 후임으로 미국인 바이올리니스트 Gregory Block이 참여했다. 그는 Mark Almond에서 이미 활동했었던 훌륭한 Rock Violinist였다. 다음 앨범인(Paspartu)가 발매된후, 1978년 순회공연부터 두번째 키보드주자 Roberto colombo와 타악기주자 Roberto Haliffi가 참가했으며, 데뷔앨범에서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제작자이며 편곡자인 Claudio Fabi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Claudio Fabi의 주된 역할은 여러가지 자극을 원하는 그룹의 음악에 그에 맞는 가사를 정돈시켜 주는 것이었다.

 

 

방황과 변화


Zoo Records를 통하여 발매되었던 (Jet-Lag)와 (Passpartu)는 Premiata Forneria Marconi의 과거에 대한 음악적 영광과 명성에 악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인기가 하락했고 팬들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들의 음악은 신선함이 사라졌고 예전의 힘이 넘치는 연주력은 상실되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견디기 힘들었던 Premiata Forneria Marconi의 멤버들은 공식적으로 활동을 중지하고 각자 다른 그룹이나 아티스트들을 위하여 스튜디오 세션맨들로서 일을 시작했다.
1979년 초반 그들은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획기적인 공연기획을 시도하는데, 그것은 Contatoure의 거장 Fabrizio De Andre와의 두달간에 걸친 공연이었다.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무대에서 그의 곡들을 간단하게 소화해 내면서 이태리의 젊은이들에게 이태리 Canzone의 고전들과 Fabrizio De Andre의 옛 연주 목록들을 알려 주었다. 이 순회 공연들을 담은 라이브 앨범들이 1979년과 1981년 여름에 발매되었다.
그러나 Fabrizio De Andre와의 공연으로 말미암아 보컬리스트였던 Bernardo Lanzetti는 소외되었고 이에 격분한 그는 Premiata Forneria Marconi로 결코 되돌아 오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계기로 솔로로 독립, 1979년과 1982년 사이에 3장의 솔로 앨범들을 발표했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알게된 다중악기주자 Lucio Fabbri가 바이올린을 들고 이때 참가했고, 또한 Area의 보컬리스트였던 Demetrio Stratos가 Milano Arena에서의 공연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다.
1980년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새로운 앨범(Suonare Suonare)를 제작한다. 그들은 80년대 첫작품으로 이 앨범에 그 시대의 음악적 조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곡들도 짧고 단순한 구성으로 되어 있으며 가사도 이태리어로 되어있다. 보컬의 대부분은 드러머인 Franz Di Cioccio가 불렀다. 이 앨범의 제작을 감독하고 조언을 맡았던 Alessandro Colombini는 Ricordi레코드사에서 오랫동안 제작자로 일하면서 Lucio Dalla, Edoardo Bennato의 제작자로서 그리고 Banco의 협력자로서 커다란 명성을 얻었던 인물이다.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1980년대부터 완전히 다른 평범한 록 그룹으로 전락해버렸다. 다른 Progressive Rock그룹들이 그랬었던 것처럼 그들도 197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1년 7월 Firenze에서 녹음된 Performance(Premiata Forneria Marconi의 약자처럼 보이는 아이디어가 빛나는 타이틀을 지닌 더블 라이브앨범)는 과거로 돌아가고픈 그들의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은 팬들이 원했었던 음악을 연주했고, 그것은 그들의 옛 곡들 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옛 곡들을 즉흥적으로 연주하면서 과거의 영광으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이미 많은 친구들이 사라졌고, 수많은 팬들이 그들을 떠나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