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icksilver Messenger Service (퀵실버 메신저 서비스)
미국 전역의 60년 중반 싸이키델릭 열기 속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룹 퀵실버 메신저 서비스는 그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10여년 간 그들만의 사운드를 고집하여 활동을 하였다.
1964년 퀵실버의 전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 시폴리나(John Cipollina), 데이빗 프리버그(David Freiberg), 짐 머레이(Jim Murray) 이 세 사람은 어려서부터 단짝으로, 그룹 결성을 꾸꾸며 근교에서 연주할 수 있는 창고를 얻어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연주 및 연습에 총력을 가했고, 많은 곡들을 작곡함으로써 언제든지 음악전선(?)으로 진출할 수 있을 정도의 연주실력을 쌓아왔다. 그후 얼마 뒤 캐시 소노반(Casey Sonoban)과 알렉산더 스펜스(Alexander 'Skip' Spence)를 맞아들이고 5인조 밴드로 전력을 가다듬었다. 또한 이미 포크 싱어로 주목받고 있던 디노 발렌티(Dino Valenti)를 맞이하려 하였으나 짐 머레이의 반대로 저지되었고 얼마후 마약복용으로 투옥됨에 따라 좌절되고 말았다. 1965년 중반에 소노반과 스펜스는 게리 던캔(Gary Duncan)과 그렉 엘모어(Gary Duncan)로 교체되었다. 그들은 이때 그룹명을 퀵실버 메신저 서비스라고 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가지며 대학가 팬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리더인 마티 볼린은 샌프란시스코의 조그마한 클럽을 인수하여 "매트릭스"라고 상호를 고친 후 연주인을 모아 에어플레인을 결성했으며 클럽 매트릭스에서 기재를 빌리면서 연주를 계속할 수 있었던 퀵실버는 이윽고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3대 밴드의 하나로 손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샌프란시스코 사이키델릭 밴드는 제퍼슨 에어플레인과 그레이트풀 데드에 의해 대표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퀵실버가 우리에게 생소한 그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제퍼슨이나 데드는 비교적 빨리 레코드를 발매한 반면 퀵실버는 1968년까지 레코드 회사의 신청을 전면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1964년부터 연주 활동을 거듭하여 그룹 이름을 퀵실버라고 정한 후 대학가에서 많은 라이브 공연을 통해 연주실력을 닦으면서 완전한 사운드를 위해 노력하던 중 그들의 음악성과 뛰어난 연주실력, 자유로운 콘서트 모습이 상당히 큰 평판을 일으킴에 따라 A&R 레코드사는 그들 그룹에 추파를 보냈다. 그러나 퀵실버는 그들 제의에 대하여 모두 거절하였다. 이유는 그들은 라이브 밴드로서의 매력을 가지는 그룹이었으며 이외에 상업성을 배제한 자신들만의 순수하며 독특한 사운드 개발을 위해서는 레코드사 측의 계산적이며 상업적인 방침과 음악적 제약을 받아들일 수 없어 타협을 거절해 왔던 것이다.
1967년 8월에 음악적 견해 차이로 보컬을 맡았던 짐 머레이가 탈퇴하자 그룹은 4명으로 계속되었다.
그후 1968년 5월 퀵실버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이해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캐피톨(Capitol) 레코드사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데뷔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때문에 다른 그룹보다 데뷔가 늦어져 이미 거대해져 있는 그룹들 사이에서 우리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된 것이다. 또한 퀵실버의 목표는 상업성이나 자신들의 음악을 알리기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될 수 있으며 더구나 우리 실정에선 희귀한 그들의 레코드를 접할 수 없었다는 까닭에 훌륭한 음악성을 가지는 이들의 음악이 일부 소수 음악 애호가들만의 전유물로 되어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