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incy Jones (퀸시 존스)
퀸시 존스(Quincy Jones)는 20세기를 빛낸 '팝 흥행사'라 칭송될 앨범 프로듀서이자 빅 밴드 마스터이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의 황금 콤비로 활약한 그는 마이클 잭슨의 성인 데뷔작 <Off the wall>(1979), 흑, 백 음악의 완벽한 크로스 오버로 전 세계 4천 2백 만장 판매라는 신기록을 달성한 <Thriller>(1982), 한층 그 볼륨을 높이며 그가 '팝의 지존'임을 다시 한번 천하에 증명한 <Bad>(1987)의 프로듀서로서 참여하며 1980년대 '팝 천하'를 일궈낸 대가이다.
마이클 잭슨을 위시해 그는 패티 오스틴, 조지 벤슨, 엘라 핏 제랄드, 레이 찰스, 아레사 프랭클린, 사라 본 등 수많은 R&B, 재즈 가수들을 비롯, 90년대 갱스터 랩퍼 갱스타(Gang starr)의 <Hard to run>(1994)에 이르기까지 프로듀서로 참여, '흑인 대중 음악의 산파자'로서의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다.
하지만 그는 명 프로듀서이기 전에 1950년대부터 카운트 베이시, 디지 길레스피와 같은 재즈의 대가들과 연주 활동을 함께 한 트럼펫 주자이자 빅 밴드마스터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나이로 빅 밴드 마스터로 무대에 섰던 그는 다수의 리더작을 발표하며 편곡과 프로듀싱에서 발군의 재능을 발휘했고, 이러한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70년대부턴 팝 가수들의 앨범 프로듀싱과 자신이 설립한 레이블 퀘스트 레코드(Qwest Record)의 기획자로서 역할에 전념하게 된다.
1933년 시카고 태생인 그는 청소년기에 트럼펫과 피아노로 재즈의 기본을 쌓아갔고, 1951년 비브라폰 주자 라이오넬 햄프튼(Lionel Hampton)의 오케스트라에서 2년 간 트럼펫 주자와 편곡자로 활동하며 재즈 계에 투신한다. 햄프튼의 밴드에서 활동하던 무렵, 비운의 하드밥(Hard-Bop) 대가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과 쿨(Cool) 트럼펫터 아트 파머(Art Farmer)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 정도로 그는 출중한 트럼펫 연주 실력을 보유하게 된다.
얼마 후 프리랜서 음악인으로 활동하며 카운트 베이시, 캐논볼 애덜리, 토미 도시, 디나 워싱턴등 쟁쟁한 재즈 음악인들의 편곡과 세션을 담당했고 1956년엔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 함께 투어활동을 하며 그는 차츰 뉴욕 52번가에서 명성을 쌓아간다.
약관의 나이를 조금 넘긴 1956년, 블루스 보이 비비 킹(B. B. King)이 소속되어 있던 ABC 레코드사와 계약, 앨범 <This is how I feel Jazz>에서 그는 밴드마스터로 데뷔한다.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등지에서 활발한 투어 활동을 전개하며 스탠더드 팝 작곡가 해롤드 알렌(Harold Arlen)이 배경 음악을 맡은 쇼(Show) 'Free & Easy'(1959)의 편곡 작업에도 참여한다. 솔로 활동과 병행해 그는 1957년, 성이 'Jones'인 음악인들과 함께 한 이색적인 프로젝트 재즈 섹스텟(Sextet) 'The Jones Brothers'결성 , 타드 존스(Thad Jones), 지미 존스(Jimmy Jones), 조 존스(Joe Jones)와 같은 재즈 뮤지션들과 잠깐 활동한다.
60년대 초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머큐리(Mercury) 레코드사에서 앨범을 발표하며 회사 내 부사장과 A&R맨(Artist & Repertoire)으로도 활동한다. 솔로 활동과 더불어 그는 이후 TV와 영화 음악에도 관여하며 화려한 경력을 쌓는다. 2차 대전 나찌의 만행을 고발한 영화 <The Pawnbroker>(1964)를 시작으로 오스카 상 4개 부문을 휩쓴 미스테리 극 <In the heart of night>(1967), 워렌 비티(Warren Beaty)와 골디 혼(Goldie Hawn)이 등장한 코미디<The Dollars>(1971),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주연한 액션물 <The Getaway>(1972), TV 미니시리즈의 새 지평을 열며 전 세계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화제작 <The Root>(1977), 남부출신 흑인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담은 우피 골드버그 주연의 <The Color Purple>(1985)등에서 영화 음악 작곡과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다방면에서 그의 재능을 펼쳐 보인다.
1969년, 그는 CTI 레코드 설립자인 명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가 소속되어있던 A&M 레코드와 의기투합, 같은 해 프레디 허바드(트럼펫), 휴버트 로우즈(플룻)를 비롯한 크리드 테일러 사단에 이름을 걸고 있는 명 연주자들이 함께 한 그의 중기 걸작 <Walking in space>(1969)를 시작으로 1981년까지 A&M 레코드에서 활동하게 된다. 1974년을 기점으로 그는 평소 해오던 밴드 마스터로서의 활동을 접고 A&M 소속 아티스트들의 프로듀서 활동에 집중한다.
1980년, 자신의 레이블 퀘스트(Qwest) 레코드를 설립, 자신의 프로듀서 하에 수많은 팝의 명작들을 양산해낸다. R&B 보컬 패티 오스틴(Patti Austin), 신스 팝의 신기원을 제시한 뉴 오더(New Order), 하드 밥 색스폰 주자 어니 왓츠(Ernie Watts), 여성 싱어송 라이터 칼리 사이몬(Carly Simon), 브라질 출신의 싱어 송 라이터 도리 캐이미(Dori Caymmi)의 앨범을 기획했고, 기타리스트 겸 팝 보컬리스트 조지 벤슨의 <Give me the night>(1980), 마이클 잭슨의 히트 작들을 비롯, 80년대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디오피아 난민 돕기 자선 앨범 <We are the world>(1984)에서도 프로듀서로 맹위를 떨친다.
20세기가 차츰 저물어가던 시점인 1989년, 그는 20세기 미국 대중음악의 본령인 흑인 대중 음악을 자신의 기획으로 집대성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마일즈 데이비스, 디지 길레스피, 사라 본, 엘라 핏 제랄드와 같은 노장 재즈 맨 들을 비롯, 블루스에서 힙합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중인 흑인 음악인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은 미증유의 대작을 발표하는데 그것이 바로 <Back on the block>(1989)이다. 자신의 레이블 퀘스트에서 내놓는 그의 야심작이기도 했던 앨범은 이듬해인 1990년 그래미 상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상이라는 대어를 낚게 된다.
90년대 들어 그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생전 공식적인 마지막 녹음인 <Montreux Jazz festival>(1991)의 프로듀싱과 편곡을 맡았고, 쿨리오(Coolio), 알 켈리(R. Kelly), 미스터 엑스(Mr. X) 등이 참여하며 당시 유행하던 재즈-힙합(Jazz-Hip hop)의 면모를 한껏 보여준 <Q's jook joint>(1994)를 기획 및 프로듀싱한다.
재즈 밴드 마스터로 음악계에 발을 들어 놓았지만 이후 창작보다는 프로듀싱으로 명성을 쌓으며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으로 대변되는 아티스트의 숙명대신 뮤직 비즈니스계의 실력자를 택한 그는 분명 순전한 의미의 재즈 음악인이라고 칭송되긴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대중 음악의 절반 이상을 규정한 흑인 대중 음악의 우수성을 흑인 스스로의 힘으로 만방에 알리는데 공헌한 인물로 그는 60년대 모타운의 전설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와 70년대 필리 소울(Philly Soul) 콤비 케니 갬블 & 레온 허프 (Kenny Gamble & Leon Huff)와 함께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흑인 대중음악계의 산 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