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y Orbison (로이 오비슨)
"로이 오비슨(Roy Orbison)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수이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이처럼 극찬했던 가수 로이 오비슨(Roy "Kelton" Orbison)은 신화적인 존재중의 하나로 아직까지 기억되고 있으며, 해가 갈수록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
'The Big O'라는 닉네임으로 불리우는 로이 오비슨은 목소리와 노래를 탄탄하게 결합시켰으며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흔치않는 힘을 지녔다. "1975년 앨범 [Born to Run]을 녹음하러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나는 밥 딜런(Bob Dylan)과 같은 가사를 만들 수 있기를 원했으며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사운드를 내기를 바랬다. 그러나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로이 오비슨처럼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80년대 미국 노동 계층의 영웅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이 오비슨(본명 Roy Kelton Orbison)은 1936년 텍사스주 버논(Vernon)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8살때 첫 라디오 장기자랑 쇼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13살이 되던 1949년에 그의 첫 밴드인 '윙크 웨스터너스(Wink Westerners)'를 결성하여 인기를 얻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밴드는 지역 라디오방송과 TV에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그들의 프로에 게스트로 나왔던 조니 캐쉬(Johnny Cash)의 조언에 따라 선 레코드사(Sun Records)의 창립자였던 샘 필립스(Sam Phillips)를 찾아간다. 처음에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던 샘은 버디 할리(Buddy Holly)의 프로듀서였던 노만 페티(Norman Petty)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곡 "Ooby Dooby"를 듣고는 계약을 하기에 이른다.
그룹명을 '텐 킹스(The Ten Kings)'로 바꾼 로이 오비슨은 선 레코드사가 있는 멤피스에서 1956년 첫 번째 싱글 "Ooby Dooby"(그의 대학 친구가 써준 곡이다)을 내놓게 된다. 그렇지만 선 레코드사와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Ooby Dooby"만이 차트에 등장했을 뿐, 그 시절에 발매된 "Sweet And Easy to Love", "Chicken Hearted", "Rock House" 등은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초기 그의 레코딩의 대부분을 프로듀스하였던 샘 필립스는(그는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 칼 퍼킨스(Carl Perkins), 조니 캐쉬(Johnny Cash),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등의 레코드를 프로듀스했다)는 그 당시의 히트곡들을 들고 와서 똑같이 부르라는 식의 주문을 했다. 샘과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로이는 그 곳을 떠나 Acuff-Rose와 계약을 한다.
1950년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작곡에 있었으며 자신의 천직은 작곡가라고 확신했다. 이미 그가 작곡하고 에벌리 브라더스(Everly Brothers)가 부른 곡 "Claudette"는 1958년 차트 30위권에 드는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자작곡인 로큰롤 넘버 "Only the lonely"를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와 에벌리 브러더스에게 권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내가 직접 노래하겠다”며 직접 이 곡을 녹음한다. 우수 가득하면서도 고음에서 불안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발군의 곡 제조로 록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로이 오비슨의 본격적인 가수인생은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고전적인 발라드 사운드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흥겨운 후렴구를 가지고 있었던 "Only the lonely"는 스피드와 파워가 특징이던 당시의 로큰롤과 분리 선을 그으며 인기를 누린다. 이 곡은 1960년 전미차트 2위에 올랐고 영국 차트에선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그의 인기는 눈부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훌륭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보컬은 여타 음악과는 완전 차별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1961년 "Running scared"가 미국차트 정상을 밟았고 1964년에는 "Pretty woman"이 다시 차트정상에 올랐다. 영국 밴드들이 미국을 점령하고 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Pretty woman"은 그에게 커다란 부와 명성을 안겨다 주었으며 영국에서도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크게 히트하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어쿠스틱 기타와 스네어 드럼의 연주가 도입부를 장식하는 이 곡은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영화에 삽입되어 다시 한번 로이의 선풍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60년 "Blue angel"을 비롯해 1961년 "Crying(2위)", 1962년 "Dream baby",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It's over(9위, 영국1위)" 등은 모두 탑 10에 진입했다. 그는 브리티쉬 인베이젼(British Invasion)이라 불리는 영국의 강세 속에서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보컬리스트였으며 영국으로 정기적인 투어를 떠나기도 하였다. 그는 영국으로 간 첫날에 비틀즈(The Beatles)의 존 레논(John Lennon)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시 작된 그들의 관계는 계속 우호적이었으며 로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비틀즈는 "Please Please Me"를 불러 그에 대한 헌정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는 1965년에 소속사를 MGM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 조건에는 엘비스가 그랬던 것처럼 로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조항도 있었다. 그리하여 1968년 영화 <The Fastest Guitar Alive>가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나 소속사는 이내 재정난을 겪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66년 그의 아내 클라우데트(Claudette)가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서 떨어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맞았고, 그 슬픔이 잊혀질 사이도 없이 이듬 해에는 집에 불이 나 두 아들이 화재로 죽게 된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스타'라는 호칭이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되었다. 큰 슬픔을 여러 차례 겪은 후 로이 오비슨의 활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싱글 하나 제대로 히트하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도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을 풍미한 가수로 사라져가던 그였지만 전성기가 오로지 1960년대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수한 곡들은 후대의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다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7년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가 "Blue bayou"를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뮤지션으로 재조명되는 순간을 맞았다. 결국 1980년대 시작과 함께 재기한다. 그 해 늦은 봄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와 함께 영화 주제곡인 "That lovin' you feelin' again(55위)"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재개하게 됐고 옛 명성에 걸맞게 에밀루 해리스와 함께 그래미상을 거머쥔다.
오랜 공백을 깨고 재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는데, 1980년 수잔 잭스(Susan Jacks)가 그의 곡 "Evergreen"을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돈 맥클린(Don McLean)이 그의 곡 "Crying'(88년 K.D. Lang과 듀엣으로 다시 불러 영화 <하이딩 아웃(Hiding out)>에 삽입되었다.)"을 불러 빅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영화 <블루 벨벳>(Blue velvet)에 "In dreams"를 삽입한 것도 로이 오비슨의 재기를 도왔다. "In dreams"는 국내에서도 영화 음악으로 사랑 받으며 친숙한 곡으로 자리해 있다. 이러한 결과로 그는 버진 레코드사(Virgin Records)와 계약을 맺고 과거 히트곡들을 새로 녹음하여 더블 앨범 [In Dreams]를 발매한다.
1987년 로이 오비슨은 후배들의 협조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른다.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거물들의 프로젝트 그룹인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ing Wilburys)'에 가담하게 된다. 이 그룹의 멤버는 한 명만으로도 영광스러울만한 이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밥 딜런(Bob Dylan), 톰 페티(Tom Petty) 그리고 이엘오(ELO)의 리더 제프 린(Jeff Lynne)으로 짜여졌고 데뷔 앨범 [Mystery Girl]에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유투(U2)가 참여했다.
하지만 '비운의 스타' 로이 오비슨은 자신의 별명대로 이 역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에게 영향을 받았던 수많은 뮤지션 중의 하나인 유투(U2)의 보노(Bono)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를 위해서 곡을 쓰는 것은 그의 유일한 비교 대상인 엘비스를 위해서 곡을 쓰는 것과 같다. 그의 가장 위대한 재능은 그가 겪었던 고통과 불행을 곡 속에 절묘하게 삽입할 수 있는 능력이다." 보노는 그를 위한 곡 "She"s A Mystery to Me"를 만들었다. "그는 록큰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의 말이다.
[Mystery Girl]은 1989년 그의 사후에 발매되었고, 비운의 스토리와 앨범 참여 면면들의 명성이 겹치면서 그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가운데 톰 페티와 제프 린이 쓴싱글 "You got it"은 차트 9위에 올라 정확히 25년 만에 톱10을 기록했다. 1992년에는 그의 미발표곡들을 모은 앨범 [King of Hearts]가 버진 레코드사에서 발매되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의 노래는 영화 삽입과 후배 아티스트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부활을 계속했다. 1991년 넘버원 히트곡인 'Pretty woman'이 동명영화에 삽입되어 오비슨 열풍을 야기했고, 같은 해 그와 함께 노래했던 동료, 후배 가수들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들을 모아 [A Black And White Night Live]라는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으로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보컬상을 수상하는 이색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보이즈 온더 사이드(Boys on the Side)에 "You got it"이 보니 레이트(Bonnie Raitt)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다.
로이 오비슨은 최고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거대한 존재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1960년대 역시 비틀즈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날개를 펴야 할 1970년대는 자신앞에 닥친 비극으로 좌절해야 했으며, 후배들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일어선 1980년대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했다. 비운으로 점철된 음악역정이었으나 팝 역사는 그 비운을 환대로 바꿔 기록했다. 끊임없는 역사적 재조명은 시공을 막론하고 그의 노래가 애청되는 길을 터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