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bbertribe (러버트라이브)
'스웨덴의 뉴 인베이전' 러버트라이브(Rubbertribe)
우리가 그렇듯 스웨덴도 분명 고유의 음악이미지란 것이 있다. 스웨덴 사람들은 넓은 음악 지평과 다양성을 내걸어 그런 한정적 정서란 없다고 강변할 수도 있겠지만 바깥나라 음악팬들이 볼 때는 선입견일지 몰라도 '스웨덴만의 음악정서'가 존재한다.
그 정서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듯 아바(Abba) 록시트(Roxette) 그리고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 등 이른바 미국의 잣대에서 나온 '스칸디나비안 인베이전' 그룹들로부터 나왔다. 이들에 의해 전해진 스웨덴의 음악느낌은 장조, 업(up) 템포, 징글쟁글 등 밝고 명랑한 쪽이다. '댄싱 퀸', '조이라이드', '올 댓 쉬 원츠'란 곡목만으로도 듣는 사람은 기분이 상쾌하다.
스웨덴에 록이 있나?
하지만 스웨덴은 월드와이드 팝과는 반대편에 위치한 서있는 또 하나의 물줄기가 있다. 사탄에 젖은 데스 혹은 블랙 메탈 무리가 그것인데 이 분야의 매니아들은 인 플레임스(In Flames) 다크 트랜퀼리티(Dark Tranquillity) 에지 오브 새니티(Edge Of Sanity) 디스섹션(Dissection) 등 이름만 들어도 전율한다. 이들 외에도 초강성 사탄찬양 메탈 키드는 스웨덴에 얼마든지 있다.
데스/블랙 메탈의 창궐은 노르웨이도 사정은 비슷하여 스칸디나비안 정서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아무래도 다른 유럽지역에 비해 록 성향이 처질 듯한 느낌과 달리 록과 메탈의 뚜렷한 흐름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상존한다는 것이다. 아바와 인 플레임스는 대척이다. 그 상극이 그 반도를 풍요롭게 또 외부에는 신기하고 신비롭게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생소한 이름의 러버트라이브는 록그룹이다. 하지만 데스 메탈은 결코 아니다. 이 그룹은 '도대체 스웨덴에 정통의, 그것이 아니더라도 대중 친화적인 트렌디 록이 있는가' 하는 소박한 의문에 대한 냉철한 응답이다. 사실 영국의 브릿팝이나 미국의 그런지와 같은 친숙한 록의 흐름과 스웨덴이란 나라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선전부족인지 아니면 대서양 양안의 외면인지는 몰라도 솔직히 영미를 강타한 록밴드도 없었다. 자꾸 스웨덴을 영미와 결부시키는 이유는 딴 어떤 나라보다도 스웨덴은 미국과 영국에 성공적 진출을 기한 그룹이 많아 정서적으로 가깝다고 인식되어있기 때문이다.
러버트라이브는 이러한 1990년대 록의 스웨덴 홀대를 일거에 제거할 스웨덴의 본격 '록 인베이전'이다. 이 그룹의 음악을 듣는 누구라도 생경함은 느끼지 않는다. 스웨덴의 유구한 전통이 배양한 것일까. 라디오헤드(Radiohead)와 이후 영국의 '넥스트 빅 씽'으로 떠들썩했던 그룹들인 콜드플레이(Coldplay) 트래비스(Travis)를 알고있는 사람들은 수월하게 러버트라이브 음악에 동화될 수 있다. 수록곡 'The act'가 명증하듯 라디오헤드의 몽환도 있고(이 그룹의 토마스 이스버그의 음색은 건조함을 빼면 드라마틱한 톰 요크와 쾌 흡사하다), 콜드플레이의 냉혹한 로맨티시즘 그리고 트래비스의 미니멀리즘 성향의 포크 요소도 찾을 수 있다.
감출 수 없는 강한 접근력
그래도 이상한 것은 라디오헤드 풍을 복제한 듯한 'Bonebreaker'나 'If I return' 'F. music' 등의 곡이 절대로 처연하거나 염세적인 분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산함이 퍼져있어도 비극성보다는 도리어 긍정성으로 밝게 다가온다. 노래하는 자의 보이스 톤이나 기타 노이즈가 가져온 인상으로 치부하기는 좀 그렇고 어쩌면 국적의 문제 아닐까. 스웨덴 출신이란 점을 도외시해선 설명이 안 된다.
신인이면서 이처럼 강하게 발휘되는 접근력은 앨범 수록곡 'Daylight'와 'Closer'('I try to turn my back on you…'부분 가사의 선율 전개가 인상적이다)에서 절정을 이룬다. 한번만 들어도 즉시 귀를 감아내는 이 노래들은 브릿팝의 흡수력이 러버트라이브에 와서 얼마나 창작적으로 상승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곡들이다. 이 그룹이 록매니아 아닌 일반대중에게 어필하느냐의 여부가 이 곡들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If I return'과 같은 곡은 미국의 인디 록에 대한 러버트라이브식의 수용이 드러난다. 노이즈 미학과 폭발적 드라이브를 선호하는 사람들한테는 아마 이 곡이 뇌리에 남을 것이다. 그룹이 브릿팝과 인디 록의 영향 아래 그 중간 어딘가(somewhere in-between)에 위치한다는 묘사가 나올 만하다.
러버트라이브는 노래 부르고 기타 치는 토마스 이그버그(Thomas Isberg)를 위시해 기타 안드레아스 바벤마크(Andreas Bavenmark), 베이스 하칸 하긱비스트(Hakan Haggqvist), 드럼 안드레아스 린드(Andreas Linde)를 라인업으로 작년 2000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엔퀘핑에서 결성된 그룹이다.
그러나 밴드의 아이덴티티는 어디까지나 앨범의 모든 곡을 작곡 편곡 그리고 프로듀스한 프론트 맨 토마스 이스버그의 재기에 의해 확립된다. 그는 심지어 콘솔에 앉아 사운드 질을 잡아낸 녹음 및 믹싱 엔지니어로도 분했다(이러한 전면적 독재는 근래 처음 볼 정도). 지루할 때면 실리콘을 가지고 여러 귀여운 공룡을 제조하는 게 마치 '고무 부족'(rubber tribe)을 만드는 것 같아 거기서 그룹이름을 착안한 사람도 그였다. 그들이 발표한 데뷔작 <Wound On My Neck For You>는 그의 뛰어난 음악감각과 지휘력이 농축된 작품이다.
펑크로 시작해 모던 록으로 비상
이스버그의 음악 출발점은 그룹의 '기타 록' 사운드패턴에 녹아있듯 펑크였다. 1994년부터 펑크 개라지 가수로 활동했으며 이때부터 곡을 써내기 시작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듬해 스웨덴 만화를 본 따 조시 앤 푸시독스(Josie & Pussydogs)를 결성했고 나중 이름이 스트리커(Streaker)로 바뀌었지만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한 채 무수한 잼 세션을 통해 공력을 다졌다.
이후 산초 판자(Sancho Panza)라는 라틴 스윙 성향의 그룹에서 활동했고 여기서 이스버그는 드러머였으나 러버트라이브에선 베이스를 연주하는 하칸 하긱비스트를 만난다. 제대 후 그는 '러버 테크닉스'라는 고무부품회사에서 일했고(그룹명이 여기서 주조된다) 그러면서도 록에 대한 의지를 늦추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곡을 써댔다.
얼마 전 이제까지 써놓은 곡을 발표하려는 욕심에 6인조를 결성했으나 스스로 고백하듯 지나치게 야심을 부린 탓에 바로 활동을 접어버렸다. 하지만 곧바로 엔퀘핑 지역밴드로 뛰고있었던 안드레아스 바벤마크, 안드레아스 린드 그리고 하켄 하긱비스트와 조우하게 된다. 아마도 하켄이 오랜 친구였던 탓에 이들과 쉬 접선이 이뤄졌을 것이다.
록에의 열정이란 공통분모로 의기투합한 이들은 러버트라이브를 밴드이름으로 정하고 곧바로 이스버그가 준비해둔 곡들로 레이블 리액티브 뮤직과 음반계약을 체결했다. 지난 3월 스웨덴에 발매된 그들의 앨범 <Wound On My Neck For You>는 '스웨덴의 넥스트 빅 씽'이란 언론의 평을 받아내며 현재 순항을 거듭하고있다고 한다.
러버트라이브 음악이 주는 친숙함은 이스버그가 쓴 노랫말에도 기인할 것이다. 결코 상상에 의한 분노가 아니며 거창한 메시지는 없다. 감각적 이 시대의 젊은이답게 사랑과 정직에 대한 솔직한 토로와 은유가 주를 이룬다. 한마디로 거짓이 없다. 그는 'Daylight'에서 한때의 연인에 바치듯 '나의 데이라이트로 너의 머리카락이 빛을 내고 그게 나를 약하게 만드네. 나의 데이라이트 속에 네 머리카락은 날 위해 빛나네. 난 항상 네 눈물 거기에 고인 피의 범람을 넘나든다. 조용히 열린 마음으로…'이란 알쏭달쏭한 언어들을 퍼뜨리고 있다. 순간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처리해 의미파악은 쉽지 않더라도 접수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부분도 스웨덴이란 내셔널리티가 작용하고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흔히 1990년대 영미그룹들의 심각함과 감정중독이 발견되지 않아 좋다(아니 편하다). 어떤 사람은 스웨덴 그룹에서 팍스아메리카 사운드에 대한 통속성이 발견되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스웨덴의 스위티 팝과 데스 메탈 팬들 양 진영으로부터 공히 버림받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정반대로 작용하게 되면 러버트라이브는 굉장한 파괴력을 발할지도 모른다. 강점과 약점이 대치한 상황에서 저울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벌써 이스버그와 그 동지들은 좀처럼 듣기 어려운 '스웨덴 모던 록의 정체'를 전하는 성과를 거두고있다. 스웨덴 록의 도전이다. '뉴 스칸디나비안 인베이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