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체크 S 
 T 
 U 
 V 
 W 
 X 
 Y 
 Z 
어제 : 379, 오늘 : 490, 전체 : 304,604
 
작성일 : 20-02-18 19:27
Styx (스틱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52  



Styx (스틱스)

 


시카고를 기반으로 한 그룹 스틱스(Styx)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를 통해 가장 성공한 '어덜트 취향의 팝 록' 밴드로 각인되어있다. 당대 그들의 성공 가도는 무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첫 출발점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 만발한 프로그레시브 록이었다. 대서양 건너편의 대륙에 비해 고전음악의 인프라가 형성되지 못한 미국은 그래도 더러 록 역사에 기억될 만한 아티스트들을 배출했다. 스틱스는 이 부문의 왕자였으며 동시대에 활동했던 캔사스(Kansas)와 앰브로시아(Ambrosia) 등 역시 미 대륙에 아트 록을 근착(根着)시키는데 공은 세운 그룹이다.


이들이 뿌린 프로그레시브 록의 씨앗은 1990년대 스팍스 비어드(Spock's Beard) 같은 후배들의 등장으로 그 열매를 맺었다. 스틱스는 유럽의 아트 록 밴드와는 달리 고전음악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무그 신시사이저를 최대한 이용해 스페이스적인 공감각(共感覺)을 표현하는 동시에 다가올 미래의 음원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시작했다.

스틱스는 시카고 남부지역을 무대로 활동했던 밴드 트레이드윈스(Tradewinds)와 TW4를 모체로 하여 탄생한다. 트레이드윈스와 TW4는 동네친구들이었던 데니스 드영(Dennis DeYoung/보컬, 키보드) 그리고 척 파노조(Chuck Panozzo/베이스)와 존 파노조(John Panozzo/드럼) 형제에 의해 결성된 밴드였다.


이들은 하이스쿨과 시카고주립대학 시절 내내 밴드를 존속시켰고 시카고 지역의 ‘C.S.U.'를 주무대로 지속적인 음악활동을 전개했다. 트리오편성이었던 이들은 기타를 전담할 수 있는 새로운 멤버로 존 쿠룰스키(John Curulewski)를 영입했고 70년에는 같은 시카고 지역에서 밴드활동을 하던 기타리스트 제임스 영(James ‘JY' Young)을 맞아들여 5인조의 라인업을 완성한다. 초기에 이들이 클래식과 재즈를 근간으로 하는 프로그레시브 록을 추구한 것은 드럼과 베이스를 맡았던 파노조 형제가 이탈리아 혈통이라는 출신 배경도 작용을 했다.
 이 새로운 라인업은 보다 실험성이 가미된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클래식과 록이 혼합된 형태에 일렉트로닉의 효과를 배합한 독특한 사운드로 구체화되어 갔다.


1971년, 밴드는 데모테입을 우든 닉켈(Wooden Nickel)레이블에 보냈고 레이블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밴드는 곧 우든 닉켈과 레코딩계약을 맺었고 1972년에 밴드명을 전설상 ‘죽음의 강'을 뜻하는 스틱스로 바꾼다. 1972년에 공개된 데뷔 앨범 [Styx]에서는 첫 싱글 "Best thing(82위)"을 비롯해 전체적으로 아트적 경향을 따른 앨범이었지만 주목받지는 못했다.
1973년에는 스틱스의 두 번째 음반 [Styx II]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비록 차트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데니스 드영이 송라이팅한 발라드 "Lady"가 시카고 라디오의 방송을 타며 상당한 인기를 모으는데 성공한다. 스틱스는 이 싱글히트에 힘입어 투어에 박차를 가했고 상당수의 팬을 확보하게 된다.

1974년 세 번째 앨범 [The Serpent Is Rising]이 발매되었는데 이 앨범은 1974년 2월에 들어서 앨범차트 200위권에 진입한다. 이어서 11월에 등장한 네 번째 앨범 [Man Of Miracles]은 전작보다 나은 판매고를 기록하며 보다 높은 순위에 랭크되었고 규모 있는 프로모션과 함께 재 발매된 "Lady"가 미국싱글차트 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싱글 "Lady"의 성공을 발판으로 1975년에는 이전에 발매되었던 앨범 [Styx II]가 재등장하여 앨범차트 20위권에 들었고 5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상업적인 성공으로 말미암아 몸이 커진 스틱스는 보다 크고 전폭적인 서포트가 가능한 레이블을 찾기 시작했고 같은 해 9월 A&M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다. 두 달 후 싱글 "Lorelei"와 함께 등장한 [Equinox]는 ‘A&M'에서의 첫 번째 발매작이 된다. 앨범은 즉각 골드를 따냈다. (이 앨범은 나중에 플래티넘 고지까지 치닫는다.) [Equinox]는 보컬리스트 데니스 드영의 건반 연주가 불을 뿜는 "Lorelei(27위)"를 잉태하면서 음악적인 진보를 이룩했다는 평을 듣게된다.


1975년 말 데뷔시절부터 부동의 위치를 지켜왔던 스틱스의 라인업에 변화가 일어난다. 기타리스트인 존 쿠룰스키가 밴드를 떠난 것이다. 스틱스의 로드매니저는 새로운 기타리스트로 시카고 밴드인 ‘MS Funk' 출신의 팝과 록에 일가견이 있는 토미 쇼(Tommy Shaw)를 추천했고 오디션을 거친 후 스틱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토미 쇼의 가입은 여러모로 밴드에게 유리하게 작용되었는데 제임스 영과의 매칭은 물론 팝과 락에 걸친 송라이팅 능력도 뛰어나 팝적인 성향이 짙었던 데니스 드영과 록에 가까웠던 제임스 영 사이에서 교량역할을 충분히 소화해냈다. 멤버가 바뀐 이 시기가 밴드의 성격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76년 말 새로운 기타리스트 토미 쇼와 함께 한 첫 앨범인 [Crystal Ball]이 발매된다. 이 앨범은 토미 쇼의 역량이 발휘되었던 작품으로 전곡 가운데 4곡이 그의 작품이었다. 앨범은 무난히 골드를 따내어 3연속 골드행진을 했고 싱글 "Mademoiselle"는 싱글차트 탑 40에 진입했다. 이 앨범은 토미 쇼가 이루어낸 첫 성과였으며, 9개월 동안 빌보드 차트 앨범 부문에 랭크되어 있었다.

스틱스는 그들의 일곱번째 앨범인 [The Grand Illusion]을 1977년 7월 7일에 공개하는 재치를 보이기도 했는데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Come Sail Away"가 1978년 1월 탑 10에 진입했고 싱글히트에 힘입은 앨범은 6위까지 도달했다. 특히 [The Grand Illusion]은 스틱스에게 최초로 플래티넘의 영예를 안겨다주었고 이후에도 "Fooling Yourself"와 "Miss America"와 같은 싱글을 양산해내며 2년여 동안 빌보드앨범차트에 머물며 꾸준히 판매고를 올렸다. [The Grand Illusion]부터 이 시카고 출신의 그룹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가공할 히트 퍼레이드를 펼치기 시작했다. 1978년에 공개된 앨범 [Pieces Of Eight] 역시 앨범 차트 6위에 올라 두 번째 플래티넘을 획득했고 "Blue Collar Man", "Renegade", "Sing For The Day"을 히트시켰다.
 
1979년에는 13세부터 19세까지의 연령층을 대상으로 갤럽에서 조사한 가장 인기 있는 밴드로 스틱스가 선정되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에 접어들어 공개된 앨범 [Cornerstone]은 미국 앨범 차트 2위에 랭크되며 스틱스의 폭발적인 인기도를 증명했다. 당연히 이 앨범 또한 플래티넘을 무난히 달성했고 "Babe", "Why Me", "Borrowed Time"을 싱글커트해 냈다. 그 중 "Babe"는 싱글차트의 1위에 오르며 밴드의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고 "Boat On The River"는 거의 전 유럽 차트의 탑 10에 진입하는 성공을 거둔다.


1981년 초 스틱스는 대대적인 북미투어를 감행했고 같은 해 4월 그들 최초로 미국앨범차트의 정상을 차지하는 마이다스 앨범 [Paradise Theatre]를 공개한다. [Paradise Theater]는 이제까지의 어떤 앨범보다도 더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앨범 차트 1위에 3주 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 앨범에서는 두개의 히트싱글이 나왔는데 하나는 싱글차트 3위를 기록한 "The Best Of Times"이었고 다른 하나는 9위에 랭크됬던 토미쇼가 보컬을 맡았던 곡 "Too Much Time On My Hands"였다. [Paradise Theatre] 앨범은 미국 내에서만 트리플 플래티넘을 획득하는 등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양이 팔려나갔으며 이전에 발매되었던 석 장의 앨범-[The Grand Illusion], [Pieces Of Eight], Cornerstone]-마저도 트리플 플래티넘을 따내는 쾌거를 거둔다. 그로 인하여 스틱스는 넉 장의 앨범을 연속적으로 트리플 플래티넘에 올려놓은 최초의 밴드로 록큰롤 역사책에 오르기도 했다.


1983년에는 하나의 컨셉트로 짜여졌던 앨범 [Kilroy Was Here]가 발매되었고, 때를 맞춰 스틱스는 대대적인 투어에 돌입한다. 이 투어는 록큰롤 역사상 가장 의욕적인 투어의 하나로 기록되는데, 스틱스는 투어의 스테이지에 앨범과 관련된 다이얼로그, 여러 가지 무대세트, 의상, 그리고 브라이언 깁슨(Brian Gibson)이 제작한 11분짜리 영상물 등을 등장시켜 앨범에서 그렸던 가상의 세계가 관객들의 눈앞에 직접 재현되도록 함으로써 앨범과 무대의 일체화를 꾀했다. 싱글커트된 "Mr. Roboto"(노래에 일본식 영어 발음이 나온다는 설득력이 부족한 사유로 당시 국내에서 금지곡 처분을 받았다)는 싱글차트 3위에 랭크되며 "Babe"의 뒤를 이어 백 만장의 판매고를 돌파한 두 번째 싱글이 되었고 "Don't Let It End" 또한 탑 10에 안착했다.

1984년 스틱스는 최초의 라이브앨범 [Caught In The Act]를 더블앨범세트로 공개한다. 이 앨범도 호평속에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지만 이때부터 스틱스의 팀워크에는 차질이 빚어진다. 밴드의 양대 프론트맨이었던 데니스 드영과 토미 쇼가 각기 솔로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스틱스의 활동이 전면 중단되기에 이른 것이다. 팀의 리더격인 그들이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의 밴드에 커다란 마이너스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부터 스틱스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간다.

데니스 드영이 발표한 솔로앨범 [Desert Moon]과 토미 쇼의 [Girls With Guns]는 모두 ‘A&M'를 통해 배급되었고 모두 탑 50위권에 든다. 1985년 12월에는 토미 쇼의 두 번째 솔로앨범 [What If]가 공개되었으나 판매고는 신통치 않았다. 1986년에는 데니스 드영이 앨범 [Back To The World]를 발매했고 이 앨범에서 싱글커트된 "This Is The Time"은 영화 [Karate Kid Part II]의 사운드트랙으로 삽입되기도 했다. 제임스 영도 얀 해머(Jan Hammer)의 도움을 얻어 만든 그의 첫 번째 솔로앨범 [City Slicker](1986)과 존 파노조가 협력했던 [Out On A Day Pass](1988)를 공개했고 토미 쇼가 애틀랜틱(Atlantic)레코드사를 통해 앨범 [Ambition](1987)를, 데니스 드영이 ‘MCA'에서 [Boomchild]를 발매하는 등 스틱스의 멤버들은 각기 솔로활동에 분주한 가운데 1987년에는 밴드의 창단멤버였던 존 쿠룰스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90년에 들어서 스틱스의 팬들에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토미 쇼가 테드 뉴전트(Ted Nugent), 나잇 랜저(Night Ranger) 출신의 잭 블레이디스(Jack Blades) 등과 함께 새로운 밴드 댐 양키스(Damn Yankees)를 결성한 것이다. 그로 인해 스틱스는 사실상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같은 해 말 스틱스는 토미 쇼의 자리를 글렌 버트닉(Glen Burtnik)으로 대체하고 재기작 [Edge Of The Century]를 공개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앨범에서 싱글커트된 "Show Me The Way"는 이듬해 탑 10에 들어 여전한 인기를 과시했다. 특별히 "Show Me The Way"는 1991년 초에 발발한 걸프전에 참전한 미군들의 안녕을 위한 노래로 쓰이면서 미국에선 대대적인 성공을 창출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타리스트 글렌 버트닉은 투어도중 스틱스를 탈퇴해 밴드 Slaves Of New Brunswick을 결성해 버렸다. 재기의 무드가 성공적으로 익어갈 무렵 된서리를 맞아버린 스틱스는 결국 다시 주저앉고 만다.


토미 쇼가 소속된 밴드 댐 양키스는 두 번째 앨범 [Don't Tread](92)를 플래티넘 고지에 올려놓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간 반면 1994년에 데니스 드영이 애들랜틱레코드로부터 [10 On Broadway]를 내놓은 것을 제외한다면 실제로 스틱스와 그 멤버들은 1990년 이후 이렇다할 만한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스틱스는 공백기가 길어질수록 세인들의 뇌리에서 멀어져갔고 어느 덧 잊혀진 밴드가 되어갈 즈음인 1995년, A&M은 [Styx Greatest Hits (Volume I)]을 내놓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초기 싱글히트작인 "Lady"가 새로운 버전으로 실렸는데 재녹음된 이 트랙에 토미 쇼가 참여해 화제를 모았으며 토미 쇼의 스틱스 복귀 뉘앙스를 짙게 풍겼다.

1996년 5월 스틱스는 13년만에 처음으로 전미투어에 돌입했고 "Return To The Paradise Theatre"라고 타이틀지어진 이 투어를 위해 비로소 토미 쇼는 스틱스의 라인업으로 돌아온다. 스틱스는 드러머를 토드 슈어만(Todd Sucherman)으로 교체한 후 곧바로 50여 개 도시를 순회하는 대규모투어를 시작했고 이에 때맞춰 신곡이 포함된 베스트앨범 [Styx Greatest Hits: Volume II]가 그해 여름에 나와주었다. (스틱스의 음악활동 재개와 더불어 데니스 드영은 [The Hunchback Of Notre Dame]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했다.) 1997년 스틱스는 A&M에서 CMC로 레이블 이적했고 "Return To The Paradise Theatre"의 실황과 3곡의 신작을 포함한 라이브실황앨범 [Return To Paradise]를 공개했다. 1997년에는 애주가였던 이 팀의 원년 멤버이자 드러머인 존 파노조(John Panozzo)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99년 스틱스는 [Edge Of The Century] 이후 9년만에 정규 앨범 [Brave New World]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한번 멤버간의 갈등을 겪게된다. 데니스 드영에게 생긴 바이러스성 질병으로 인하여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다른 멤버들은 차후의 앨범작업과 투어에 객원 보컬을 기용할것을 원했다. 토미 쇼와 제임스 영은 Lawrence Gowan을 새로운 보컬로 영입하여 [2000's Arch Allies: Live at Riverport (split 50-50 between Styx and REO Speedwagon)], [2001's Styx World: Live 2001] 두 장의 라이브 앨범을 발매하기에 이른다. 이즈음 솔로 투어링을 시작한 데니스 드영은 Styx라는 이름의 사용으로 인하여 토미 쇼와 제임스 영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척 파노조가 AIDS에 걸렸다는 루머까지 돌며, 스틱스는 끊임없는 난황을 겪게된다.

2005년 스틱스는 비틀즈를 비롯한 다른 아티스트들의 곡을 커버한 앨범 [Big Bang Theory]를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