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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17 23:59
Stevie Wonder (스티비 원더)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43  



Stevie Wonder (스티비 원더)

 

 
1960년대 제임스 브라운과 더불어 흑인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칭송되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팝 소울 음악의 전설 모타운 레코드(Motown)사에 소속되어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대부터 셀프 프로듀싱(Self-producing)을 선언하며 앨범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티스트'의 천재(天才)를 부각시킨 팝 스타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롯, 앨범 녹음시 대부분의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해 낼 정도의 다재(多才)를 유감 없이 발휘한 그는 도무지 시각 장애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독창성을 자신에 음악에 담아낸다. 또한 마빈 게이(Marvin Gaye)와 함께 1970년대 미국 사회 내 흑인들의 비참한 삶과 애환을 표현한 '게토 리얼리티'를 얘기한 음악인으로 기억되면서 흑인 인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이끌었던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다.

자신의 노래를 통해 스티비 원더는 지금껏 인종과 이념의 벽을 넘어선 절대불변의 숭고한 가치인 '사랑의 전도사'임을 전 세계에 알려왔다. 그의 음악만큼이나 이런 그의 행적은 전 세계 음악인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으로 그를 기억하게 했다.


1950년 5월 13일 스티브 랜드 모리슨(Steveland Morrison)이라는 본명으로 미국 미조리주 출신인 그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의 과잉 산소 공급 사고로 맹인이 되었다. 디트로이트로 이주해 소년기를 보낸 그는 일찍부터 음악적으로 재능을 드러내 10살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악기를 스스로 터득하는 천재성을 보인다.

1962년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는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베리 고디(Berry Gordy Jr.)가 이끄는 모타운 레코드사와 계약을 한다. 리틀 스티비 원더(Little Stevie Wonder)라는 아름으로 발표한 그의 첫 싱글인 라이브 버전 'Fingerprints-part 2'(1963)가 발표 즉시 차트 1위에 오르며 순조롭게 출발한다.

1965년부터 이후 6년 간 'Uptight'(1966), 'I was made to love her'(1967), 'For once in my life'(1969), 'My cherie amour'(1969), 'Yester-me, yester-you, yesterday'(1969), 'Signed, sealed, delivered'(1970)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그는 명실상부한 모타운 대표 인기스타로 떠오른다.


21살이 되던 1971년 모타운 측과 재계약을 앞두고는 '앨범 제작에 관한 모든 통솔권을 자신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계약 조건을 내세운다. 당시까지 철저한 '스타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모타운 사의 입장에선 매우 부담스러웠던 요구를 그는 끝내 관철시키며 셀프 프로듀싱으로 제작한 첫 앨범 <When I'm Coming From>(1971)을 발표한다.


이듬해인 1972년 <Music of my Mind: 앨범 차트 21위>를 시작으로 같은 해 가을 발표된 명반 <Talking Book:앨범 차트 3위>(1972)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앨범 모든 수록 곡의 작곡은 물론 연주와 프로듀싱을 혼자서 해낸다. 또한 이 앨범은 A면의 첫 곡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와 B면의 첫 곡 'Superstition'을 모두 싱글차트 1위에 등극하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한다. 1972년 같은 해 발표된 두 장의 앨범을 통해 그는 기존 3분대의 모타운 식 히트 곡의 틀을 벗어나 'Super woman', 'Maybe your baby'와 같은 6-7분대의 대곡을 과감히 수록했고, 재 계약을 통해 받은 계약금으로 클라비넷, OBX, ARP, 폴리포닉, 무그와 같은 다양한 신시사이저 장비들을 도입, 사운드의 혁신을 일궈낸다.


이듬해 발표한 <Innervisions>(1973)는 그의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위상을 한층 높여준 명반으로 흑인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Living in the city'와 재즈적인 접근을 강하게 드러낸 'Too High', 'Superstition'에 버금가는 펑키한 넘버 'Higher Ground', 절대자인 신에게 헌정하는 가스펠 곡 'He's Misstra know it all'을 담은 수작이었다. 전작에 이어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며 <Innervisions>는 이듬해인 1974년 그래미 상 '올해의 앨범' 부문을 비롯, 4개 부문을 휩쓰는 쾌거를 올린다.


1974년 교통사고로 심한 부상을 당하며 잠시 활동의 위기를 맞은 그는 이에 아랑곳없이 <Fulfillingness' First Finale>(1974)를 발표하며 'You Haven't done nothing', 'Boogie on Reggae woman'을 각각 팝 차트와 R&B 차트 1위에 올리며 앨범은 1975년 다시 한번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비롯, 5개 부문을 석권한다.(올해의 앨범상을 연속으로 수상한 건 스티비 원더가 처음이었다.)


1975년 모타운 사와 1천 3백만 불의 재계약을 한(당시 팝 음악계에선 최고의 액수) 그는 2년여의 준비 끝에 더블 앨범<Songs in the key of life>(1976)을 발표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히트곡이 쏟아진 앨범에서 'Sir Duke', 'I Wish'가 팝 차트 1위에 오르고, 팝 가수 조지 마이클이 1998년에 리메이크 하기도 한 7분이 넘는 대곡 'As'(36위)와 재즈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George Benson)의 코러스와 재즈 플롯주자 바비 험프리(Bobby Humphrey)가 참여한 라틴 팝 'Another star'(32위) 역시 좋은 반응을 얻는다. <Songs on the key of life>는 이듬해 1977년 다시 그에게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안겨다 준다.

70년대 말, 스티비 원더는 흑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음악 외에도 흑인의 권익신장 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그는 4년여의 공백 끝에 발표한 <Hotter than July>(1980)의 수록곡 'Happy Birthday'를 통해 이런 그의 노력을 전 세계에 알린다.(결국 1985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은 미국 국경일로 지정된다) 앨범에선 이 외에 레게의 시인 밥 말리(Bob marley)에게 헌정하는 레게 넘버 'Master Blaster(jammin')'와 지금껏 애청되는 그의 러브 발라드 'Lately'를 차트에 진입시키는(각각 5위, 64위) 성과를 거둔다.


영화 음악 작곡에도 열심이었던 스티비 원더는 <Journey Through the secret life of Plant>(1979)를 시작으로, 그에게 오스카 주제가 상을 안겨준 영화 <Woman in Red>(1984)의 테마 곡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팝 차트 1위에 올리며 전 세계를 스티비 원더 열풍 속으로 다시 한번 몰아넣는다. 그의 영화 음악 작업은 <Jungle Fever>(1991), <The adventure of Pinocchio>로 계속된다. 1983년엔 폴 메카트니와 함께 한 듀엣 곡 'Ebony & Ivory'로, 1985년 'Part time Lover'로 다시 팝 차트 1위에 오르며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Character>(1987)이후 8년이라는 긴 공백기에 들어간 그는 <Conversation Peace>(1995)로 다시 팝 무대에 복귀한다. 90년대 활동은 비록 예전만큼의 날카로운 창조력은 아니었지만 전 세계 수많은 팝 음악인들의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는 그 누구도 재현 못할 '팝 음악의 대가'임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