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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17 23:40
Steely Dan (스틸리 댄)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55  



Steely Dan (스틸리 댄)

 

 
1970년대 록 음악을 논하는데 있어서 스틸리 댄(Steely Dan)만큼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밴드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록 음악의 결정판이라 할 라이브 공연을 기피한 체 오로지 스튜디오 테두리 안에서 '음(音)의 연금술'을 감행했다. '대중적인,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사운드를 표방한 스틸리 댄은 스튜디오에서 다양한 음악적 자양분을 수렴, 좀처럼 따라하기 힘든 자신들만의 사운드를 가공해냈다.


라이브 공연을 통해 팬들과 '하나'가 될 것을 다짐한 1960년대 '히피들의 이상'을 뒤로 한 채 어느덧 집으로 돌아간 1970년대 록음악은 '자신의 음악적 개성'을 보다 강조하기 시작한다. 록음악에서 이와 같은 '나 중심의 시대'(Me Decade)적 징후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록시 뮤직(Roxy Music)으로 대표되는 중성적인 매혹에서부터, 클래식 선율에 몽환적이고 스펙터클 라이브 공연을 표방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예스(Yes)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룹들을 통해 표출되었다.

여기에 '더블 솔로 프로젝트'를 통해 스튜디오에서의 실험을 표방한 토드 런드그렌(Todd Rundgren)의 <Something/Anything>(1972)처럼 스틸리 댄은 '실험'이라는 무거운 화두를 가장 대중적으로 소화해내는 데 앞장서는 부류였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가 제시한 재즈 록(Jazz Rock) 퓨전 사운드를 기조로 스틸리 댄은 정통 재즈, 블루스, 컨트리, 밥 딜런의 포크, 비틀스 풍의 팝, 라틴, 월드 뮤직 등을 뭉뚱그려 놓은 듯한 독창적인 사운드를 창조해낸다. 여기에 그룹의 핵인 도널드 페이건의 달콤쌉싸름한 보컬이 실어 나른, 산(酸)처럼 자극적이나 상쾌한 선율은 '스튜디오 실험 밴드'라는 이들의 심오한 의도와는 달리 대중적으로도 그들의 음악이 알려지는 데에 기여한다.


실제로 이들이 10년여 활동하는 동안 내놓은 7장의 앨범은 모두 골드를 기록했다. 스틸리 댄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록 밴드들을 비롯해, 재즈 음악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회자되며 수많은 리메이크를 통해 대중음악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증명한다.

스틸리 댄은 1967년 미국 뉴욕의 바드 대학(Bard College) 동창인 도널드 페이건과 월터 베커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둘 사이의 음악적 교분은 레코드회사에 보낼 데모 만들기로 이어졌고, 1969년 거스 마커스(Gus Marcus)와 팝 보컬 밴드 제이 앤 아메리칸스(Jay & Americans)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인 앨범작업과 투어에 나선다. 이 때 밴드 활동을 통해 알게 된 기타리스트 데니 디아스(Denny Dias)를 만나면서 스틸리 댄이 결성된다.


윌리엄 버로우(William Burrough)의 소설 <벌거벗은 점심(Naked Lunch)>에 나오는 남성 성구(性具)의 이름을 따온 밴드의 발칙한(?) 명칭 또한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71년 뉴욕에서 만난 프로듀서 게리 캐츠(Gary Katz)와의 운명적 만남은 이후 '스틸리 댄 사운드'를 가능하게 해 준 밑거름이었다.


이듬해인 1972년 MCA와 계약, 페이건과 베커 두 사람을 주축으로 데이비드 파머(David Palmer; 보컬), 제프 박스터(Jeff Baxter; 기타), 짐 호더(Jim Hodder;드럼)가 참여한 데뷔작 <Can't Buy a Thrill>(1972)를 발표한다. 보사노바의 흥겨운 리듬이 감지되는 'Do it again'과 부기리듬의 블루스 넘버 'Reelin' in the years'가 싱글로 커트 되며 톱10을 기록하는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얻어낸다.


전작보다 재즈적인 색채가 농후해진 2집 <Countdown to Ecstasy>(1973)는 전작과 달리 이렇다 할 히트 싱글은 없었지만 스윙 리듬이 넘실거리는 재즈 록 'Bodhisattva', 스틸리 댄 사운드의 전형인 'Boston rag', 독특한 엇박 리듬의 'Show biz kids', 세련된 선율이 돋보이는 R&B풍의 'My old school'등 지금도 밴드를 대표하는 명곡들이 대거 포진된 수작이다.

그러나 앨범 작업에서의 독특한 사운드만큼 라이브 연주에선 빛을 발하지 못한 이들의 연주는 이내 밴드 내의 갈등으로 이어져 이듬해 드러머 데이비드 파머가 탈퇴하고, 이후 연주 밴드 토토(Toto)의 드러머로 유명해진 제프 포카로(Jeff Pocaro), 두비 브라더스의 멤버로 유명한 키보드 주자 마이클 맥도널드(Michael Mcdonald)가 참여, 밴드의 최고 명반 3집 <Pretzel Logic>(1974)을 녹음한다.


이 앨범에서 펑키 재즈 피아니스트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의 스탠더드 'Song for my father'의 주요 멜로디를 차용한 'Rikki, don't lose that number'는 싱글차트 4위에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앨범 <Pretzel Logic>을 통해 스틸리 댄은 재즈 거장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의 처녀작 'St. East Louis toodle oo'를 재즈 록으로 재해석했고, 비밥 명인 찰리 파커(Charlie Parker) 헌정하는 'Parker's band', 'Charlie freak'을 통해 재즈를 향한 본격적인 관심을 무리 없이 펼쳐낸다.


당시 라이브 투어에 염증을 느낀 리더인 도널드 패이건과 월터 베커는 밴드를 2인 체제로 재편, 스튜디오 앨범 작업에만 몰두한다. 전작보다 말랑말랑한 느낌이 배가된 팝 성향의 4집 <Katy Lied>(1975)는 래리 칼튼의 기타, 톰 스코트, 웨인 쇼터의 테너 색스폰, 윌튼 펠더의 베이스 등 당대 일급 세션 맨들이 연주에 참여하며 'Black Friday', 'Rose darlin' ', 'Doctor Wu'를 위시해, 전작에 못지 않은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얻는다.


이듬해 발표한 펑키한 느낌이 한층 강화된 <Royal Scam>(1976) 역시 전작의 제작 방식을 고수하며 세션 주자 래리 칼튼의 기타 솔로가 빛을 발한 'Kid Charlemagne', 'The fez'가 히트했고, 타이틀곡 'Royal scam'은 '스튜디오 사운드'에 대한 밴드의 강한 지향성을 읽게 해준다.


재즈 연주에 대한 지속적인 밴드의 관심은 <Aja>(1977)에서부터 한층 즉흥성 비중을 둔 대곡 연주 형식을 갖추게 된다. 리 리트너와 재즈 펑크 밴드 크루세이더즈가 세션으로 참여한 이 앨범에서 웨인 쇼터의 색스폰 솔로가 재즈의 기운을 배가시킨 타이틀곡 'Aja'이 주목받았고 싱글은 'Peg(11위)' 'Deacon Blues(19위)' 'Josie(26위)'가 모두 톱40을 기록하는 인상적 실적을 남긴다.

데뷔 시절부터 영화 음악에도 관심을 가져온 스틸리 댄은 이 무렵 존 알론조(John A. Alonzo) 감독의 1978년 영화 <FM>의 주제 곡 'FM'을 발표한다. 사운드 트랙 <FM>은 두비 브라더스, 이글스, 톰 페티, 린다 론 스태트, 보스턴, 퀸, 빌리 조엘 등 70년대 록 음악의 거성들의 진면목을 잘 응축해놓았다.


<Aja>까지 매년 꾸준히 발표해 온 이들의 음반활동은 3년의 공백이 있은 후 공식적으로 마지막 작품인 7집 <Gaucho>(1980)으로 이어진다. 재즈 보컬 패티 오스틴(Patti Austin)의 보컬 세션이 탁월한 'Babylon sisters'와 함께 'Hey Nineteen'은 싱글차트 10위에 올라 이들의 통산 3번째 톱10곡이 된다. 이듬해인 1981년 두 사람의 공식적인 결별이 있을 때까지 스틸리 댄의 인기는 꾸준히 지속된다.


각자의 솔로 활동으로 접어든 스틸리 댄은 1982년에 발표한 도널드 페이건의 솔로 작 <The Nightfly>가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얻었고 기타 주자였던 월터 베커는 리키 리 존슨의 앨범 프로듀싱 및 세션 활동에 전념한다.

밴드 해체 후 10년만인 1990년 도널드 패이건의 앨범 <Kamakiriad>에서 이들 둘은 다시 조우, 1993년 함께 투어를 하며 스틸리 댄의 재결합은 점차 가시화된다. 정확히 7년 후인 2000년, 20년만에 재결합한 스틸리 댄은 통상 8집인 <Two Against nature>를 발표하며 앨범 발매 즉시 빌보드 앨범 차트 6위라는 신기원을 남긴다.


컴백 앨범 <Two against nature>에선 통통 튀는 펑키 리듬과 여전히 건재한 도널드 페이건의 보컬이 절묘하게 만난 'Cousin dupree'가 호응을 얻었다. 스틸리 댄은 이듬해 열린 그래미상에서 베스트 록 밴드 부문과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을 수상, 2관왕을 기록하며 밥 딜런 이후 노장 로커의 위용을 한껏 전 세계에 드러내며 화제를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