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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09 19:45
Sex Pistols (섹스 피스톨즈)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20  



Sex Pistols (섹스 피스톨즈)
 


 
브리티쉬 펑크(British Punk)의 1세대인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는 불과 2년여의 기간동안 단 1장의 앨범을 발표하는 것을 끝으로 밴드 활동을 마감했지만 록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품위없는 언행과 난폭한 무대 매너, 영국 왕실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 냉소와 허무주의로 가득찬 무정부의적인 음악으로 요약되는 섹스 피스톨즈는 스투지스(The Stoogies), 클래쉬(The Clash), 버즈콕스(The Buzzcocks) 등과 더불어 70년대 펑크 부흥의 구심점이자 록큰롤 혁명의 핵이었다. 단 한 장의 싱글도 발매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들의 노래가 던지는 충격의 여파는 섹스 피스톨즈를 단박에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거의 악명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들에게 쏟아지던 영국 언론과 젊은이들의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70년대 초 런던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던 말콤 맥라렌(Malcom McLaren)-뉴욕 돌스(New York Dolls)의 매니저로 활동하기도 했다-은 동창생이었던 폴 쿡(Paul Cook, 56년생, 드럼)과 스티브 존스(Steve Jones, 55년생, 기타)를 만나 의기투합한다. 이들은 밴드를 조직하기로 결심하고 맥라렌의 상점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고 있던 글렌 매틀록(Glen Matlock, 56년생, 베이스)을 비롯해 왈리 나이팅게일(Wally Nightingale), 델 눈(Del Noone) 등을 합류시켜 스완커스(Swankers)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당시 존스는 보컬을 맡고 있었으나 나이팅게일과 눈이 밴드를 떠나고 팀을 재정비하면서 기타로 전향했다. 섹스(Sex)로 밴드명을 개명한 이들은 새로운 보컬이 필요했고 오디션을 통해 존 리든(John Lydon, 56년생, 보컬)을 영입한다. 얼마후 밴드는 다시 섹스 피스톨스라는 새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존 리든 역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썩어빠진 자니'(Johnny Rotten)로 이름을 바꾼다.


클럽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하던 섹스 피스톨즈는 EMI 레코드를 통해 76년 전영국을 들끓게 한 문제의 싱글 [Anachy In The U.K]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해 12월 TV쇼프로에서 천박한 욕설을 내뱉어 언론의 맹공격을 받게 되고 결국 두달만에 EMI로부터 계약파기를 통고받는다. 얼마 후에는 멤버들과 음악적인 견해가 달랐던 매틀록이 밴드에서 해고-매틀록은 비틀즈의 음악에 경도돼 있었다-되고 수지 앤 더 밴시스(Siouxsie & The Banshees)와 플라워즈 오브 로맨스(Flowers Of Romance)의 멤버였던 시드 비셔스(Sid Vicious)가 새로운 베이시스트로 가담한다. A&M 레코드로 이적한 섹스 피스톨즈는 영국 왕실에 대한 비판을 담은 두 번째 싱글 [God Save The Queen]을 발표하였으며 이 음반들은 영국내에서 금지곡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파급력으로 퍼져나갔다. 77년에 이들은 '퀸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보트를 타고 영국 국회의사당이 바라보이는 템즈강 위에서 'Anachy In The UK'를 부르다가 체포되기도 한다.


얼마지나지 않아 A&M사로부터도 버림받은 섹스 피스톨즈는 미국의 워너 브라더스사를 통해 록역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데뷔앨범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77)는 발매했다. 앞서 발표한 두 곡의 싱글을 비롯해 EMI 레코드사에 대한 신랄한 냉소를 담은 'E.M.I', 'No Feelings', 'Pretty Vacant' 등이 수록되어 있는 이 앨범은 UK 차트 정상에 올랐는데 앨범 타이틀의 'Bollock'이란 단어 때문에 한때 경범죄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섹스 피스톨즈는 논란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했다.


유일한 오리지널 앨범이 되고 만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의 발매에 이어 이듬해 초 섹스 피스톨즈는 미국 투어를 벌이지만 투어가 끝나자마자 자니 로튼이 밴드를 탈퇴해 버리고 나머지 세명의 멤버는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히트곡 'My Way'의 가사를 개작해 부르는 등 활동을 계속해 나간다. 그러나 가십란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시드 비셔스가 78년 10월 맨하탄의 첼시어 호텔에서 여자친구인 낸시 스펀진(Nancy Spungen)을 사냥칼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체포되면서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보석금을 내고 귀가한 시스 비셔스는 바로 다음날인 79년 2월 2일 21세의 나이로 그리니치 빌리지의 자신의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약물과용이었다. 후에 시드 비셔스와 낸시 스펀진의 약물과 폭력으로 점철된 자유분방하고 광기어린 행각은 86년에 [시드와 낸시(Sid And Nancy)]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2년의 짧은 기간 동안 음악을 포함해 멤버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끊임없이 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던 섹스 피스톨즈는 결국 시드 비셔스의 죽음을 맞이하며 해체를 하고 말았다. 매니저인 맥라레은 섹스 피스톨즈를 유지시키고자 했으나 스티브 존스와 폴 쿡은 이를 거부하고 또다른 펑크 그룹을 결성해 활동을 계속했다. 자니 로튼 또한 뉴욕을 거점으로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Public Image Limited)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앨범을 발표하고 있었다.


섹스 피스톨즈의 해체 이후 이후 여러 레이블에서는 이들의 라이브 앨범과 베스트 앨범 등을 발매했다. 상업적인 목적을 뚜렷하게 띄고 있는 이와 같은 일련의 앨범 발매는 음악 산업에 대한 반항심을 품고있었던 섹스 피스톨즈의 의도에 크게 반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밴드 결성 20주년이 되던 지난 96년 초창기 멤버 4인이 다시 뭉쳐 섹스 피스톨즈라는 이름을 되살렸다. 사망한 시드 비셔스의 자리는 창립 멤버인 글랜 매틀록이 다시 채웠으며 이제 40대가 된 왕년의 펑크 투사들은 라이브 앨범 [Filthy Lucre Live](96), [Alive](96), [[Live at Winterland 1978](97) 등을 발표하며 활동 재개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