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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09 21:24
Simon & Garfunkel (사이먼 & 가펑클)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76  



Simon & Garfunkel (사이먼 & 가펑클)

 



1957년 톰과 제리(Tom & Jerry)라는 이름의 듀오가 "Hey schoolgirl(49위)"로 미국차트에 얼굴은 내민다. 이들이 훗날 20세기 최고의 듀오로 평가받는 폴 사이먼(Paul Simon)과 아더 가펑클(Arther Garfunkel)이었다. 60년대 가장 성공한 포크/록 듀오인 사이먼 & 가펑클(Simon & Garfunkel)은 골드를 기록한 히트 앨범 시리즈와 싱글 앨범으로 당대 팝 필드를 구가했다. 이들의 음악은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하모니,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의 조화, 섬세하면서 동시에 현악 편곡의 세련된 멜로디와 영문학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예리하면서도 정제된 사이먼의 가사로 특징지을 수 있다. 폴 사이먼이 70년대에 솔로로 크게 성공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은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그의 실력을 간과했지만, 사실상 사이먼 & 가펑클 최고의 작품들은 다 그의 창작력의 산물이다.


1941년 10월 13일 뉴저지 주 뉴워크(Newark)에서 태어난 폴 프레데릭 사이먼(Paul Frederick Simon)과, 그보다 23일 늦게 뉴욕에서 태어난 아더 가펑클(Arthur Garfunkel)은 어릴 때부터 뉴욕의 포레스트 힐즈(Forest Hills)라는 동네에서 자라난 동년배의 친구였다. 포레스트 힐즈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듀오를 결성한 이 두 친구는 당시 유행하던 로큰롤과 두웝(Doo-wop; 40년대에서 60년대 초에 걸쳐 유행한 장르로, 보컬 그룹들이 곡의 중간에서 악기 대신 입으로 부르던 소리. 뉴욕의 흑인 빈민 거주지역에서 등장하여 발전했음.) 히트곡들을 즐겨 불렀다. 


1955년부터 함께 곡을 쓰기 시작하여 어느 정도의 자신이 생기자 1957년 빅 레코드(Big Records)를 통해 톰과 제리(Tom & Jerry)라는 이름으로 첫 싱글 "Hey schoolgirl"을 발표한다. 당대 유행하던 에벌리 브라더스(Everly Brothers) 스타일의 로큰롤인 이 곡은 이듬 해에 미국 차트 49위에 올랐고 12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거듭되는 실패로 활동을 포기하게 되고 고등학교 졸업 후 각자 대학에 입학하면서 톰과 제리는 결국 이별을 고하게 된다.


콜럼비아 대학에 입학한 아더 가펑클은 수학과 건축을 전공했고 폴 사이먼은 퀸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음악이었다. 가끔씩 연주를 하며 곡 쓰기에 열중했던 폴 사이먼은 제리 랜디스(Jerry Landis)라는 이름으로 몇 장의 싱글을 발표했고, 아더 가펑클은 아티 가(Artie Garr)라는 이름으로 싱글을 발표했다.


60년대 초반, 폴 사이먼이 음악출판사에 팔았던 많은 곡들 중의 하나가 콜럼비아 레코드(Columbia Records)사의 프로듀서인 톰 윌슨(Tom Wilson)의 관심을 끌게 된다. 1962년 포크 듀오로 다시 결합한 이들은 콜롬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하고 결국 1964년 포크 록을 표방하며 톰과 제리가 아닌 사이먼 & 가펑클로 재결합을 이룬 뒤 실패한 데뷔작 [Wednesday Morning 3 A.M.]을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이 앨범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이먼 & 가펑클의 음악과는 다른 면을 보여준 앨범으로 포크의 리바이벌이라 불릴 정도로 트래디셔널이나 커버 곡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지만 폴 사이먼이 송라이터로 본격적인 가세를 하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앨범에서 아무런 히트곡도 내놓지 못한 채 실패를 하게 되자 또 다시 둘은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폴 사이먼은 영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면서 런던에서 포크 순회 공연을 시작했으며 솔로 앨범인 [Paul Simon Song Book]을 녹음하였고, 아더 가펑클 또한 대학원에 진학하여 자신의 삶을 모색하게 된다.


여기서 끝날 뻔한 이들의 만남은 데뷔앨범의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톰 윌슨의 혁혁한 전공으로 인해 화려함을 꽃 피우게 된다. 1965년 포크/록의 열풍이 식어가고 있을 즈음, 밥 딜런(Bob Dylan)의 전자음악 작업을 돕고 있던 톰 윌슨은 이들의 데뷔 앨범에 어쿠스틱 기타로만 이루어져 수록되었던 곡 "The sounds of silence"를 전자기타, 베이스, 드럼으로 장식해 일렉트릭 사운드로 둔갑시켜 완벽한 포크 록으로 탈바꿈시켰으며, 결국 1966년초 이 곡은 차트 정상 등극을 이뤄냈다. 국내에서도 60-70년대 내내 애청되면서 '3천만의 팝'이 된 이 곡은 당시 차트에서 비틀스와 번갈아 가며 1위 자리 다툼을 벌였다.


이를 계기로 폴 사이먼과 아더 가펑클은 다시 결합을 하게 되고 이들의 음악은 마침내 정통 통기타 포크에서 '포크 록'으로 재무장된다. 이때부터 사이먼 & 가펑클의 실질적인 레코딩 작업이 시작되었다. 1966년부터 이듬 해까지 "I am a rock(3위)", "Homeward bound(5위)", 나중 뱅글스(Bangles)의 리메이크로 유명한 "A hazy shade of winter(13위)"등의 일련의 히트곡들을 쏟아내며 단숨에 팝계의 주류로 부상하며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우선 데뷔앨범부터 [Parsley, Sage, Rosemary & Thyme]까지 3장의 앨범이 차례로 골드 이상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를 기반 삼아 1968년에는 센세이션을 일으킨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 감독의 영화 <졸업>(The Graduate)의 사운드 트랙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이먼 & 가펑클의 앨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이 앨범은 폴 사이먼이 대다수의 곡을 썼고 참여한 아티스트는 사이먼 & 가펑클외에 연주자 데이브 그루신뿐이였다.


영화의 성공과 더불어 앨범의 인기도 치솟아 차트 정상에 9주간을 머물렀고 판매고도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들의 두 번째 싱글차트 1위곡 "Mrs. Robinson"이 이 때 탄생을 했으며, 1969년 3월에 있었던 11회 그래미 어워드(Grammy Awards)에서 '최고의 영화음악(Best Original Score)'을 수상하며 이들에게 첫 번째 그래미상 트로피도 안겨주었다. 달콤한 "Scarborough fair/Canticle(11위)"가 후속으로 인기를 얻었다. 앞 곡은 국내에서 "스카보로의 추억"이란 제목으로 애청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Parsley, Sage, Rosemary & Thyme], [Bridge Over Troubled Water]과 더불어 이들의 3대 명반으로 일컬어지는 앨범 [Bookends](1968)가 발매되었다.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했던 이 앨범은 "Mrs. Robinson"과 "A hazy shade of winter"같은 기존의 히트작 외에도 "America", "At the zoo(16위)", "fakin it(23위)", "Old friends" 등이 동시다발로 주목받았다.

이들은 또한 1967년 3월에는 런던의 로열 알버트 홀(Royal Albert Hall)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여름에 개최된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International Pop Festival)에도 참여하였다.


사실 사이먼 & 가펑클의 초기 앨범은 미숙한 감이 있었지만, 폴 사이먼의 작곡이 완성도를 더해가고 스튜디오 녹음 기술의 발달로 점차 향상되어 갔다. 또한 그들의 음악은 매우 깔끔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팝과 록의 청중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최상의 음악 동료로서 10년 이상을 함께 한 폴과 아트의 파트너십은 점차 약해져 갔다. 높아져만 가는 인기에 비례하여 둘의 사이에 균열의 조짐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폴 사이먼이 거의 대부분의 곡들을 썼음에 비하여 하이 테너의 목소리로 보컬부분에서 발군이었으나 상대적으로 작곡 능력이 떨어지던 아더 가펑클은 상대적인 열등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70년 이들 최고의 성공작이자 팝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반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끝으로 이들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앨범에서는 수록곡중 "The boxer"가 1969년에 발표되어 7위까지 오르면서 대박을 예고했는데 앨범이 발매되자 수주만에 차트 정상에 뛰어올라 무려 10주간을 머무르며 현재까지 미국서만 8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갔고 타이틀곡도 싱글차트 정상에 6주간 등극했다. "Cecilia(4위)", 그리고 유난히도 한국에서 사랑 받았던 "El condor pasa(If I could)(18위)"는 후속타였고 13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선 본상 3개 부문을 포함하여 6개의 트로피를 휩쓸었다(그때까지 그래미상 다관왕 신기록).


이별을 고한 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데 폴 사이먼은 1972년 솔로 데뷔앨범을 시작으로 2000년까지 꾸준한 창작활동을 해나가며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 중 [Still Crazy After All These Years]와 [Graceland] 같은 앨범은 그래미 앨범상을 수상한 작품들이다. 반면 아더 가펑클은 듀오의 해체와 동시에 마이크 나콜라스의 영화 두 편에 연이어 출연하며 가수가 아닌 배우로서 외도를 했고 1973년에 솔로 데뷔앨범 [Angel Clare]을 발매하기에 이른다.


사이먼 & 가펑클의 해체후 소속 레코드사에선 1972년 앨범 [Simon & Garfunkel's Greatest Hits]를 내놓고 돈벌이에 나섰는데 이들을 잊지 못하는 많은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현재까지 미국내 13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이 앨범에선 처음으로 싱글 발매되는 "America(97위)"와 라이브 버전의 "For Emily, whenever I may find her(53위)"이 사랑을 받았다.


또한 서로가 각자의 음악생활을 하면서도 이따금씩 함께 활동하는 우정어린 모습을 보여주었다. 1972년에 대통령 후보인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을 위한 자선 콘서트에 모습을 드러냈고 1975년 폴 사이먼의 솔로 앨범 [Still Crazy After All These Years]에 아더 가펑클이 보컬로 참여한 "My Little Town(9위)"이 히트후 TV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여 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1981년에는 지금까지도 사이먼 & 가펑클의 최고의 공연 무대로 칭송 받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Central Park) 자선공연에 50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10년이 지난 후에도 식지 않는 인기를 과시했다. 이듬 해 이 공연 실황은 라이브 앨범 [The Concert in Central Park]로 발매되어 플래티넘을 기록하였다. 이 공연은 공식적으론 두 사람이 함께한 마지막 무대였다.


사이먼 & 가펑클은 1990년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는 영광을 누렸고 1999년 20곡이 수록된 한 장의 베스트 앨범이 발매되어 다시 세인들의 관심이 쏠렸다. 2002년에는 1967년 뉴욕시 링컨센터 필하모닉 홀에서 녹음된 라이브 앨범 [Live From New York City,1967]이 발매되었다.

비록 사이먼 & 가펑클은 더 이상 그룹으로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60년대 중반 그들이 남긴 주옥같은 명곡들은 올드 팝 팬들의 귓전에 여전히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