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mmy Bolin (토미 볼린)
“한 그룹에 오래있지 못하는 나에 대해 말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음악적인 열정이 강하다보면 한 밴드의 색채 속에서 때론 답답함이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스웨덴 계와 시리아 계를 부모로 둔 혼혈아 토미 볼린은 1951년 8월 1일 미국 오하이오 주 스노우 시티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여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어서 기타와 오르간 등에도 손을 댔지만 끝까지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기타였다. 혼혈아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는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토미는 스쿨밴드를 조직해 음반을 통해 고독을 풀곤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학교생활을 원만히 하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장고 라인하르트, 칼 퍼킨스, 지미 헨드릭스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68년에 콜로라도의 로컬그룹 Zephyr에 가입, 프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그룹에서 1년간 활동하며 2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이어서 재즈록 그룹 Energy에 참가하지만 이 팀 역시 곧 해산되고 만다.
토미 볼린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제임스 갱에 가입하면서부터이다. 전임자인 도미닉 트로이아노가 그룹 게스 후(Guess Who)로 가버리는 바람에 토미는 조 월쉬의 추천을 받아 제임스 갱에 가입하였다. 그룹 제임스 갱에서 타미는 73년 앨범 [Bang]과 [Miami]를 녹음했다.
2장의 앨범에 참여한 토미는 제임스 갱을 탈퇴하고 이번에는 명 재즈 드러머 빌리 코헴의 앨범 [Spectrum]에 세션을 맡아 재즈퓨전 기타리스트로의 역할도 훌륭히 해냈다. 이후 토미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정리하는 솔로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LA, 뉴욕, 런던 등을 오가며 평소 함께 연주해보고 싶었던 뮤지션들을 만나 앨범제작을 함께 할 것을 제의한다.
이 즈음 리치 블랙모어가 그룹 딥 퍼플을 떠나자 존 로드는 토미에게 딥 퍼플과의 세션을 권유하였다. 약 20분에 걸친 세션이 끝나자 딥 퍼플은 토미를 리치 블랙모어의 후임 기타리스트로 맞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토미는 딥 퍼플의 앨범 [Come Taste The Band]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편 타미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첫 솔로앨범 [Teaser]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음악적인 면에서나 멤버간의 유대에 있어서나 난항을 겪던 딥 퍼플은 결국 76년에 해산되고, 토미는 그해 9월 두 번째 솔로앨범 [Private Eyes]를 완성했다. 이 작품을 기화로 토미는 다시 노마 진 벨(색소폰), 마크 스테인(키보드) 등과 그룹을 결성했지만 경제적인 문제와 마약중독 등으로 인해 밴드를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76년 12월 4일 토요일 밴드와 함께 마이애미 호텔에 머물던 중 약물중독이 악화됐고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린 토미의 여자친구가 급히 앰블런스를 불렀지만 도착하기 전에 그는 죽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토미는 6일 후 아이오와주의 Sioux에 묻혔다.
그는 재즈적 어프로치를 소유한 록 기타리스트이다. 한때는 제임스 갱이나 딥 퍼플 등 하드록 밴드에서 명성을 날리기도 했으나 그의 진짜 면모는 재즈적 색채의 애드립에서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펜타토닉 스케일을 도리안 등 재즈적인 모드와 겸용해 쓰기 때문에 보다 퓨전적인 기타를 들려주며, 특히 빌리 코헴의 솔로앨범 [Spectrum]에서 이와 같은 재즈기타를 들을 수 있다. 이외에 그는 멜로디라인에 대한 착상도 뛰어나 'Savannah Woman', 'Gypsy Soul', 'Someday Will Bring Our Love Home' 등과 같은 감동적인 곡들을 많이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기타리스트이기 이전에 작곡가로서 발군의 능력을 보여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