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lvet Underground (벨벳 언더그라운드)
록음악 역사에서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만큼 짧은 활동기간 동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독창적인 음악활동을 지속해온 그룹은 없을 것이다.
혁신적인 아방가르드 음색, 폭발할 것 같은 이들의 록음악은 그들 가사 속에 녹아있는 변태적이고 사회적 실존주의적인 정서 때문에 당시 사회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파격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이들의 열광적인 지지자와 몇몇 비평가들로부터 받은 격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대중들로부터는 외면 당했으며 심지어는 경멸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중 후반의 주요 록 밴드로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펑크와 뉴웨이브를 비롯한 여러 밴드들에게 현재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로큰롤 음악에 심취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50년대 후반 두왑(Doo wop, 흑인 R&B 코러스의 한 형태) 스타일의 곡을 녹음하기도 했던 루 리드(Lou Reed, 기타·보컬·송라이팅)는 60년대 초반 아방가르드 재즈와 심오한 시에 몰두하였고, 졸업 후 뉴욕의 픽위크(Pickwick) 레코드사에서 전문 작곡가로 일하게 된다.
그 무렵 클래식 음악을 공부한 웨일즈 출신의 존 케일(John Cale, 베이스·비올라·오르간)을 만나게된 루는 아방가르드와 로큰롤을 결합시키려는 공통의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해 밴드를 발족하게 된다.
65년 리드와 케일은 대학 시절부터 리드와 함께 곡 작업을 해왔던 기타리스트 스털링 모리슨(Sterling Morrison), 드러머 앵거스 맥라이즈(Angus McLise)를 영입하였고, 당시 유행하던 페이퍼 잡지의 타이틀을 따서 4인조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결성한다.
그러나 첫 공연에서 밴드가 돈을 받고 연주를 하자, 예술에 대한 모독으로 느낀 앵거스는 밴드를 탈퇴하였고, 그 자리엔 스털링의 친구 여동생인 모린 터커(Maureen Tucker, 드럼)가 들어오게 된다.
이 시기에 밴드의 송라이터인 루는 맨하탄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힘든 현실을 그들의 작품세계에 담았고, 'Heroin', 'I'm waiting for the Man', 'Venus in Furs' 등의 곡에서는 마약, 가학/피학적 음란성, 타락 등을 모린의 빈틈없는 기계적 드럼 비트와 더 거칠어진 록 리프의 기타 연주, 때때로 스크래치되는 비올라의 음색으로 표현했다.
이 무렵 미술가이자 만능 팝 아티스트인 앤디 워홀(Andy Warhol)이 우연히 클럽에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연주를 듣게 되는데, 이들의 가능성을 감지한 앤디는 66년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 앨범 제작을 지원하였으며, 밴드에 유럽계 모델이자 가수인 니코(Nico)를 추천한다.
이미 루가 리드보컬로 자리잡고 있던 터라 밴드는 니코를 그룹의 간판 얼굴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데뷔 앨범 중 세 곡을 부르게 된다.
'Venus in Furs', 'I'll Be your Mirror', 'Femme Fatale', 'Sunday Morning' 등 당시만 해도 센세이셔널한 마약과 섹스에 관한 주제로 논란의 여지를 만들긴 했지만, 이들의 감각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면모는 루의 탁월한 선율로 표현되었다.
여하튼 이들의 첫 앨범 [The Velvet Underground and Nico]는 레코드 회사의 정책 및 다른 복합적인 요인 탓으로 67년이 되어서야 발매되었다.
그러나 당시 언더그라운드 록 라디오는 거의 시작단계에 있지도 않았고, 사이키델릭 음악에 의해 평정되다시피 한 팝계에서 이들의 대담한 음악은 겨우 차트 171위를 차지했을 뿐이었다.
물론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말한 것처럼 당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앨범을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그 앨범을 구입한 사람들은 대부분 밴드를 결성했을 정도로 이들은 거의 숭배에 가까운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광신도와 같은 팬들의 성원도 이들의 상업적인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했고, 결국 앞으로의 향방을 모색하던 끝에 나머지 멤버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니코가 밴드를 탈퇴하고,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도시 투어에 몰두한다.
이런 가운데 여전히 급진적인 가사와 소음에 가까운 편곡, 소리를 증폭시킨 기타로 특징지어지는 공격적인 두 번째 앨범 [White Light/White Heat](67)가 발매된다. 17분 짜리 'Sister Ray'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199위에 그쳤으며 또 한번 상업적인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68년, 밴드의 존립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준 문제가 발생한다. 너무나 독창적이며 개성이 강한 두 사람, 루와 존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결국 존은 밴드를 떠났고 그 자리에 도우 율(Doug Yule)이 영입되어 69년 그룹은 셀프 타이틀의 세 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두 번째 앨범에 비해 내용 면에서는 더욱더 급진적인 좌익 성향을 띄었지만, 전통적인 록 악기를 사용하며 효과적인 사운드를 구사한 이 앨범은 루의 개인적인 로맨틱 작품 'Pale Blue Eyes', 'Candy Says'가 포함되어 인지도를 얻었으며, 이후 그룹은 라이브 밴드로서 명성을 얻으며 순회공연에 돌입한다.
70년대 초, 아틀란틱 레코드사와 계약하면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탄탄대로를 달릴 것처럼 보였지만, 그룹 내에서 개인적인 문제들이 돌출함에 따라 밴드는 다시 위기상황에 직면한다. 바로 강한 사운드의 주조가 되었던 모린이 임신관계로 그룹을 떠나면서 도우의 동생인 빌리(Billy Yule)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고, 밴드의 핵심인 루가 탈퇴한 것이다.
70년 이들 앨범 중에서 가장 주류 팝 팬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진 전형적인 록 앨범 [loaded]를 발매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도우가 리드 보컬을 맡아 73년 [Squeeze]를 발표하지만, 사실상 루가 없는 벨벳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 앨범은 불행히도 벨벳의 리스트로 인정받지 못했다.
80년대 데이빗 보위(David Bowie), 브라이언 이노, 패티 스미스(Patti Smith) 등의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각자 성공적인 솔로 활동을 쌓아가던 루 리드, 존 케일, 모린 터커는 93년 일시적으로 재결합하지만 다시 해체하고 만다.
95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The Rock and Roll Hall of Fame)에 선정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비록 현존하고 있는 밴드는 아니지만, 그룹의 음악적 모태인 루 리드의 역량에 따라 잘 짜여진 음악 구조 안에서 다채롭고 때로는 도전적인 음색을 구사했으며, 미미한 앨범 판매고와는 비교되지 않는 큰 영향력을 구가하며 현재까지도 최고의 록 밴드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