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ctor Choi(최 건) 최건(崔健)은 1961년 8월 경북 경주를 본적으로 둔 부친 최용재씨와 소수민족 가무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던 어머니 상춘화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는 연변 자치주에서 주변인을 벗어날 수 없는 소수민족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자치주 학교에서도 중국어만을 교육했고, 더욱이 그는 북경 근교의 군대 사택에서 자라 비교적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가 1997년 내한 때 자신은 조선족이라고 하기 보다 중국인이라고 밝힌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민족문제는 우리의 선택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부모가 내게 남겨준 우리의 운명의 일부분이고, 난 어릴 적 내 부모와 이미 수없이 이 문제에 관해 토론해왔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식으로 존재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난 어릴 적부터 완전히 중국인으로 자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솔직히 내가 대표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고, 간단하기 그지없는 혈통문제보다는 내 내면이 표출하는 것들에 대해서 토론하고 싶다.” 공군군악대에서 활동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4살 되던 해부터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자연스럽게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북경가무단과 당시로서는 꽤 유명했던 북경애화관현악단(北京愛和管絃樂團)에서 트럼펫주자로 활약하게 되었다.
1981년부터는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1984년에는 총 7명으로 구성된 다국적 밴드 칠합판(七合板)을 조직하여 북경의 작은 카페에서 연주활동을 했다(이 시절 그의 첫 음반이 만들어졌지만 지나치게 센티멘탈한 음악이어서 최건은 훗날 자신의 음악생애에서 이 앨범은 제외하고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즈음부터 그는 외국에 다녀온 친구를 통해 듣게 된 비틀스, 롤링 스톤스, 토킹 헤즈, 폴리스 등 서구 록음악을 통해 본격적인 록으로 전향했다. 이 때 처음으로 외국 록을 차용해서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야'라는 의미의 '불시아불명백(不是我不明白)'라는 곡을 만들었다. 1985년에는 북경에서 열린 가요제에 출전,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인 1986년에 열린 '세계 평화의 해' 기념공연은 그의 음악 생에 전기가 된 사건이었다. 당시 농민들이 즐겨 입던 군복 바지와 러닝 차림에, 붉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무대에 등장한 최건은 단신에 기타를 들고 이후 중국청년들의 가슴 속 송가가 된 '일무소유(一無所有)'를 불렀다. 객석에 앉아있던 관중들은 처음 애조 띤 선율에 실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와 언제 함께 가겠냐”는 자신들의 처지와 너무나 꼭 같은 이야기에 깊숙이 빨려들었고, 곧이어 터져 나오는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의 Rock 리듬에 혼을 빼앗긴 것이다. 이 날로 무명의 가수였던 일약 중국청년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이 곡은 6.4 천안문사태 때도 시위군중의 찬가가 되어 '중국판 아침이슬'이 되었다.
1987년 그는 첫 앨범 <신장정 길에서의 로큰롤(新長征路上的搖滾)>을 발표했고 천안문사태가 무력진압 되고 난 후 세계의 우려 속에서도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이 개최된 가운데 최건은 그 첫 앨범 타이틀을 그대로 딴 전국순회공연에 돌입해 아시안게임 개최의 서막을 장식했다. 1991년에는 <최후의 총성 최후(最後一槍)>과 <해결(解決)>이 수록된 2집 앨범을 발표했으며 1994년에는 권력을 마음껏 비웃는 내용의 3집 앨범 <붉은 깃발의 알>을 내면서 여전히 강렬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아시아의 상업문화는 매우 싫어합니다. 그런 면에서 난 아직도 음악을 처음 했을 때 하고싶었던 일을 견지하고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즐거워야 한다는 거죠. 사람들은 즐겁게 해서 내 음반을 사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음악을 통해 더 많은 것들을 보게 하는 거죠. 이런 면에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최건의 전성기 시절 가사에는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자란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탐색이 담겨있다. 자신은 그저 사랑노래라고 강변했지만 듣는 이들은 노래에 시대적 상황을 결합해 '시대의 증언자'로 의미를 확대 해석했다. 그러나 1990년 후반 들어서 중국대륙에 상업문화의 파도가 들이닥치고, 대륙가수들에 비해 세련된 홍콩과 대만 가수들의 음반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최건도 인기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근래 그의 공연에서는 그를 환호했던 관객들도 그가 최근 곡을 부르자 썰물처럼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사람들도 많지 않다고 한다. “최건은 늙었다.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도 늙었다. 난 이제 늙은 것 같다.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온종일 최건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렀는데 벌써 졸업한지 6년이나 흘러버렸다. 이제 공을 찰 힘도 없고 노래 들을 힘도 없다. 나도 최건도 늙었다. 요즘 신세대들은 최건의 노래를 이해 못한다. 우리 30살이나 그 위쪽 나이 먹은 사람들이나 이해한다. 하지만 난 아직도 최건의 '붉은 천' '꽃집 아가씨' '가행승' '붉은 깃발의 알'을 좋아한다. 그의 사이트에 올려진 한 팬들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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