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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25 00:26
Who,The (후, 더)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34  



Who,The (후, 더)

 

 

 

록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그룹 더 후(Who,The)는 흔히 비틀스(Beatles),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와 더불어 '록 르네상스'를 주도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의 침공)을 3분한 밴드로 평가된다. 비틀스가 록의 예술성과 다양성을, 롤링 스톤스가 록의 반항성과 삐딱함을 대표한다면 더 후는 록이 가지고 있는 젊음, 즉 청춘의 피끓는 혈기를 상징했다. 록과 록의 역사를 다룬 백과사전의 전설들 코너에, 비평가들의 글에 그들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록분야를 벗어나면 더 후라는 이름은 당장 소외된다. 롤링 스톤스와 비틀스는 알아도 그들은 잘 모른다. 행여 이름은 인지하고 있더라도 금방 떠오르는 노래가 없다.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구미에서도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정은 비슷하다. 더 후의 노래에는 우리 정서가 원하는 선율이 없었다. 따라서 더 후의 곡이 팝의 일상성을 획득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일반 대중과는 달리 비평가를 비롯한 록관계자들로부터 받는 사랑은 편애라 해도 별로 과장된 말이 아닐 정도이다. 1965년 데뷔 앨범 [My Generation]에서부터 1975년 앨범 [The Who By Numbers]에까지 그 사이에 발표한 대부분의 앨범들이 수작으로 거론될 정도다. 특히 1969년 앨범 [Tommy]와 1971년 앨범인 [Who's Next]는 예외없이 비평가 선정 명반으로 뽑히고 있다.

 

더 후는 기존의 밴드들과는 달리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의 기타에 리듬 섹션의 기본을 두고, 존 엔트위슬(John Entwistle)의 베이스 기타와 키스 문(Keith Moon)의 드럼이 각각 즉흥 연주를 펼치는 독특한 스타일이었으며, 로저 달트리(Roger Daltrey)의 보컬 역시 이들만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데 한 몫을 했다. 피트는 계속해서 밴드를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고자 하였으며, 절정기 당시 이들이 록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고 파워풀한 밴드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더 후가 록역사에서 전설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세 가지 사실이 바로 비평가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며 음악 팬들이 기억해야 할 상식이기도 하다.

 

첫째, 더 후는 1960년대 중반 영국의 과격한 청춘문화인 이른바 모드(Mod)와 함께 등장했고 그것을 강도 높게 반영했다. 모더니스트의 줄임말인 모드는 본래 패션 운동으로 저임금의 단조롭고 지루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영국 중산층 이하의 젊은 노동자들이 TV와 고급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서 유혹적으로 선전되는 값비싼 것들을 향유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소외감을 독특한 복장에 의한 욕구불만의 발산으로 해소하려 한 것이었다. 오토바이와 로큰롤을 가까이 한 '로커(rocker)'와 함께 청춘문화를 주도했으나(비틀스는 로커에 속한다) 모드는 하층민적인 로커와 달리 잘 입고, 정규 직업을 유지하고, '스쿠터'를 타며 약물을 즐기는 도시적 패턴을 취했다. 더 후가 표현한 모드 정서는 분노와 청춘 세대의 공격성이었고 무정부주의적인 것이었다. 더 후의 기둥인 기타 리스트 피트 타운센드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가 영국의 모드 운동이었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운동이었고 히피 무브먼트보다 규모가 컸다. 그것은 군대, 강력하고 거친 틴에이저들의 군대였다. 모드가 되기 위해서는 짧은 머리에 스마트한 복장, 좋은 구두와 셔츠를 살 돈이 있어야 했고 미친놈처럼 춤출 수 있어야 했다. 항상 약에 취해 있어야 하고 램프로 뒤덮인 스쿠터를 가져야 했다.”

 

'더 후(The Who)'로 그룹명을 바꾼 그들은 1965년 데뷔 앨범을 발표했고 현실을 신랄히 비난하는 모드족의 성가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My generation]이였다.

 

'사람들은 우리를 억누르려 한다. 단지 우리가 그들이 보기에 몹시 추워 보이는 곳을 돌아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늙기 전에 죽고 싶다.'

 

늙기 전에 죽고 싶다(Hope I die before I get old). 이 한마디가 초창기 더 후의 이미지 전부를 말해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록역사상 최초로 과격한 어조를 동원해 청춘과 기성 세대와의 분리를 이행한 것이었다. 그만큼 이 충격적 선언은 한편으로 '늙기 전에 죽지 못한' 그들을 막판까지 끈질기게 괴롭혔다. 하지만 데뷔시 그들이 펼친 모드 운동은 그들을 단숨에 살찌울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역시 모드 세대의 찬가인 "Anyway Anyhow Anywhere"도 타운센드에 따르면 '반 중년, 반 상층 계급 그리고 젊어서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의미의 노래'였다. "The Kids Are Alright", "I Can't Explain"과 함께 이러한 노래들은 어느 노래보다 먼저 '청춘의 반란'으로 일컬어지는 록의 규범을 확립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연주나 무대 제스처에 있어서도 록의 규범을 제시했다. 이것이 더 후가 갖는 두 번째 의미이다. 공연장에서 더 후는 영락없는 네 명의 폭도들이었다. 드러머 키스 문은 부수어대듯 드럼을 쳤고(더 후 사운드의 상징이다) 피트 타운센드는 펄쩍펄쩍 뛰면서 풍차를 돌리듯 팔을 휘두르며 기타 스트링을 가로질렀으며, 보컬리스트 로저 달트리는 마음껏 외치며 청중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나마 베이스 주자 존 엔트위슬은 의연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그것은 결코 기성 세대나 엘리트의 품위와는 상관이 없었다.

 

멤버들의 외모도 '불량 서클' 아이들을 무색케했다. 피트 타운센드는 한 마리 독수리였고 키스 문은 무정부주의자 같았으며 로저 달트리는 테러리스트의 인상 그것이었다. 언제나 비(非)스페셜리스트였던 존 엔트위슬도 잘해 봤자 폭도의 '보급계'같았을 뿐 큰 차이는 없었다. 도무지 폴 매카트니의 세련된 매너와 믹 재거의 섹스 어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록의 '하위문화'적 특질과 정확히 맞물리는 요소였다. 그들은 록이었기에 도리어 '특혜'를 받았고 그에 따른 모범생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들은 또 록의 슬로건인 '제한된 공간에서의 파괴'를 증명한 존재들이었다. 무심결에 야간업소 공연에서 낮은 천장으로 인해 기타 목을 부러뜨린 것에 착안, 그들은 이후 콘서트 때마다 악기를 부수어 버리는 파괴 연출을 일상화했다. 실상 영화제작자로 나중 더 후의 관리자가 된 키트 램버트(Kit Lambert)와 크리스 스탬프(Chris Stamp)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진 이러한 행위는 모드와 더불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더 후의 멤버들은 공연 뒤 머문 호텔마다 그 시설물을 부수는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의 음악이 조용할 리 없다. 더 후의 사운드는 소음으로 정의되며 애초부터 발라드와는 인연을 맺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앰프 사용을 극대화했다. 일례로 밥 딜런(Bob Dylan)과 함께 공연한 와이트 섬(Isle of Wight) 페스티벌에서는 그때까지 영국에서 가장 커다란 사운드 시스템을 동원해 사상 최고의 출력을 내뿜었다. 그때 스피커 중 하나는 청중들에게 "15야드 안으로 진입하지 말라"는 경고딱지가 붙어 있었다. 1976년 5월에 있었던 미국 찰튼 애드레틱 풋볼 클럽 콘서트는 록 그룹에 의한 '가장 시끄러운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들은 소음 발산을 통해 하드 록 생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드 록 또는 헤비메탈 계보의 맨 위에는 더 후가 있다. 역시 메탈의 산파 역할을 한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도 피트 타운센드가 나서서 공식무대 데뷔를 주선했고, 지미의 죽음과 실연 때문에 좌절한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재기를 도와준 사람도 피트 타운센드였다.

 

그의 그룹 더 후는 또 하나의 공적인 록과 팝의 역사에 깊이 새겼다. 그들을 기억해야 할 세 번째 이유이기도 한 그것은 바로 그들이 록사상 최초로 '록 오페라'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1969년에 만들어 낸 [Tommy]는 피트 타운센드의 탁월한 음악감각과 정신적 동경이 합쳐진 것이었고 모험적 시도를 넘어 음악 예술의 측면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평가받은 작품이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오페라를 록이 꾸려 냈다는 것은 록의 무한한 잠재력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60년대의 록이 사회성 뿐 아니라 '예술성'에도 적극 손짓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Tommy]는 비틀스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밴 모리슨의 [Astral Weeks]과 함께 록이 더 이상 순간의 흥분이 아닌, 영구 불변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뽐냈다.

 

'토미는 충격으로 인해 보지도 듣지도 말할 줄도 모르는 아이가 된다. 마음속의 장벽 때문에 자아를 찾지 못하는 토미는 핀볼의 마법사가 되어 대중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이후 그는 어머니의 호소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 마침내 새로운 사람이 되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줄거리인 [Tommy]의 메시지는 '독립'과 '자유'였다. 거창한 듯 하지만 결국은 더 후가 추구해 온 모드와 무대 위의 폭발이라는 주제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타운센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는 10대의 반란이라는 순간에 지속되는 '대결'과 '도피' 사이의 역동성에 대한 은유이다. 그것은 또한 로큰롤의 주제이기도 하다. 10대 때는 자신을 결코 책임지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대결하든 도피하든, 클래시(Clash)의 말로 하면 머물든 나아가든 간에(Should I stay or should I go) 틴에이저 시절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당신이 홀로 서 있는 것을 깨달을 때이다.”

 

[Tommy]가 의미하는 것과 관계없이 그것은 오페라라는 이름만으로도 록의 찬란한 영광으로 남아있다. 오페라 실연으로, 앨범으로 또 1975년 켄 러셀(Ken Russel)의 영화로, 1979년 웨스트 엔드 연극으로, 이어서 1990년대에는 브로드웨이 작품으로 다채롭게 해석되면서 하나의 전설로 상승했지만 최후의 영예는 역시 더 후의 록이었다. <뉴욕 타임스>지는 [Tommy]를 두고 “수미상관은 물론 거창한 어휘인 오페라라고 하기에는 충분한 순환 테마를 가지고 있다”면서 “우수한 곡들로 가득차 있고 우아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긴 형태 록(long form rock)의 경이”라고 극찬해 마지않았다.


색소폰 주자인 아버지와 교향악단에서 노래를 하던 어머니로부터 음악적인 영향을 받은 어린 피트 타운셴드(1945년 5월 19일 생)는 팝 스타가 되기를 꿈꾸며 기타 연주에 몰두했던 학생이었다. 중학교 시절 존 엔트위슬(1944년 10월 9일 생)과 '컨페더리츠(Confederates)'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연주를 했던 피트는, 이미 열 세 살 때 기타 소리가 시끄럽다는 할머니의 꾸중을 듣고 기타를 부순 경력을 가지고 있다. 1962년, 동급생인 로저 달트리(1944년 3월 1일 생)를 영입한 이들은 더그 샌덤(Doug Sandom)이라는 드러머와 '디투어스(Detours)'를 결성하고 활동을 시작한다.

 

1964년은 밴드에게 중요한 해이다. 그들에게 모드의 세계를 알려준 프리랜서 정치평론가 피트 미든(Pete Meaden)을 만났으며, 새로운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 1947년 8월 23일 생)이 밴드에 들어온 것이다. 피트 미든은 그룹의 이름을 '하이 넘버스(High Numbers)'로 바꾼 후 폰타나(Fontana) 레이블과 싱글 계약을 이루었고, 결국 이들의 첫 싱글 "I'm The Face"가 발매되었다. 같은 해 9월, 키트 램버트(Kit Lambert)와 새로운 매니지먼트 계약을 이룬 이들은 그룹명을 '더 후'로 바꾸고 매주 화요일마다 유명한 마키 클럽(Marquee Club)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곳의 사운드 시스템의 열악함에 분노한 피트는 그 곳에서 처음으로 기타를 부수게 된다. 이후 이 기타 부수기는 이들 공연의 주된 레파토리가 되었다.

 

1965년 1월, 데모 테이프를 들은 (그룹 Kinks의 프로듀서로 유명한) 미국인 프로듀서 셸 타미(Shel Talmy)가 이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의 도움으로 브런즈윅(Brunswick) 레이블과 계약을 이룬 더 후는 곧 싱글 "I Can't Explain"을 발매했고, 미국에서도 데카(Decca) 레이블을 통해 선보이게 된다. 이 곡은 영국 차트 8위를 기록하며 더 후의 이름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중년층과 상위 계급, 젊은 부부들에 반(反)하는’ 내용의 싱글 "Anyway, Anyhow, Anywhere"와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My Generation"을 탑 10 차트에 올리며 인기를 누리던 이들은 같은 해 12월, 기념비적인 데뷔 앨범 [My Generation]을 발표한다.

 

이듬 해인 1966년,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가 새로이 설립한 레이블 리액션(Reaction)과 계약을 한 밴드는 다양한 콘서트와 방송에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한다. 그리고 12월에 두 번째 앨범 [A Quick One]을 발표하여 좋은 평가를 얻는다. 이제 이들의 위상은 미국 시장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1967년 발표한 새로운 앨범 [The Who Sell Out]에서 커트 된 싱글 "I Can See For Miles"는 미국에서 최초로 탑 10 히트를 기록한 더 후의 작품이다. 히트 싱글 "Magic Bus"를 비롯하여 라이브 음원들을 담은 앨범 [Magic Bus](1968)는 미국 차트 39위에 올랐다. 1969년 더블 컨셉트 앨범 [Tommy]가 발매되었다. 록 오페라 사상 최초의 성공작으로 평가받는 이 앨범은 언더그라운드뿐만 아니라 메인스트림에서도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더 후는 우드스탁(Woodstock Music & Art Fair)과 아일 오브 와이트(Isle Of Wight) 축제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에디 코크런(Eddie Cochran)의 로큰롤 클래식을 리메이크한 싱글 히트곡 "Summertime Blues"가 수록된 라이브 앨범 [Live At Leeds](1970) 이후 이들은 더욱 강력하고 치밀한 연주로 가득한 걸작 앨범 [Who's Next](1971)를 공개한다. 앨범에 수록된 "Baba O'Riley", "Bargain", "Behind Blue Eyes", "Won't Get Fooled Again", "My Wife" 등의 곡들은 1970년대의 라디오에서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며 더 후의 대표적인 애청 곡이 되었다. 이들 최고의 히트 싱글들을 모아 놓은 컴필레이션 [Meaty Beaty Big And Bouncy](1971)은 영국 차트 9위와 미국 차트 11위에 올랐다. 이어지는 이러한 커다란 성공 이후 피트는 다시 한 번 대작컨셉트 앨범을 기획하기 시작하는데, 결국 1973년, [Tommy]에 이은 두 번째 록 오페라이자 더블 앨범인 [Quadrophenia]가 발표된다.

 

그러나 이 앨범의 발매 이후 그룹의 조직력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1975년에 발표된 [The Who By Numbers]는 전에 비할 수 없이 초라한 작품이었다. 1978년 발표한 앨범 [Who Are You]에서는 당시 펑크 음악의 영향을 보여주기보다는 이들이 컨셉트 앨범에서 추구하던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요소를 더욱 강하게 나타냈다. 이 앨범의 발표 직후인 1978년 9월 8일, 더 후의 역동적인 사운드를 이루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드러머 키스 문이 알코올 중독의 치료를 위해 처방된 약물의 과다 복용으로 런던의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더 후는 사실상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밴드는 다시 일어서기로 했고 결국 스몰 페이시스를 거친 드러머 케니 존스(Kenney Jones)를 맞이하여 새로운 활동에 들어간다. 비정규 멤버인 키보드 주자 존 번드릭(John Bundrick)이 그룹에 참여하게 된 것도 이 즈음이다. 자신들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사운드트랙 [The Kid Are Alright](1979)이 발표되었고 공연도 계속된다. 하지만 1979년 12월에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을 시작으로 더 후는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미국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에서 있었던 콘서트 도중 자리 때문에 몰려들던 관객들에 짓밟혀 11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1981년에는 앨범 [Face Dances]가 발매되어 판매고는 좋았지만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다음 해 [It's Hard] 앨범 이후 고별 공연을 가졌다. 결국 1983년 12월, 더 후는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한다. 이후 밴드의 마지막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Who's Last](1984)와 B 사이드 트랙들을 모은 두 장의 컴필레이션 [Who's Missing](1985)과 [Two's Missing](1987)이 발표되었고, 1989년에는 세 명의 오리지널 멤버들이 다시 뭉쳐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Join Together](1990)를 비롯한 다양한 컴필레이션 앨범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이후 더 후의 멤버들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 1989년 캐나다 토론토 공연차 다시 모이지만 이전만큼의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온갖 모순과 교묘한 절충 속에서도 더 후는 끊임없이 내적 긴장, 진지한 야망, 모험욕을 통해 1960년대 록이 확립한 반란, 파괴 그리고 모험의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실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