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체크 Z 
어제 : 298, 오늘 : 919, 전체 : 343,281
 
작성일 : 20-02-25 08:34
10,000 Maniacs (텐 싸우전드 매니악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71  



10,000 Maniacs (텐 싸우전드 매니악스)  

 

 

대학생 취향의 록음악, 즉 컬리지 록이 어떠한 성향의 음악인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알이엠(R.E.M.)과 더불어 텐 싸우전드 매니악스(10,000 Maniacs)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컬리지 록의 흐름은 주로 스로잉 뮤지즈(Throwing Muses), 픽시스(Pixies) 등 주류 팝과는 거리를 두고 있던 '펑크 록' 밴드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의 메시지는 대부분 추상적이었고, 표현의 방법은 확실했지만 이미지는 거칠었다.


매니악스는 그러나 추상적인 구호에 그치지 않았고, '포크 록'을 기본으로 한 뉴 웨이브 스타일의 재기 발랄한 음악으로 친근감을 확보하면서 그들과 차별선을 그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주인공은 밴드의 간판이자,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긴치마를 입었던 여성 나탈리 머천트(Natalie Merchant)였다. 1963년 뉴욕의 제임스타운에서 태어난 나탈리는 어릴 때부터 유달리 조숙한 아이였다. 이민노동자 집안의 자녀로서 남들보다 일찍 가난과 불평등 같은 사회문제에 눈을 떴고, 10대 시절에는 아메리칸 인디언과 유태인 학살 등의 테마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16살 어린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여 1981년 존 롬바르도(John Lombardo)를 만나 텐 사우전드 매니악스를 결성했다.


초창기에는 멤버가 12명에 달하는 대가족이었는데, 얼마 후 스티븐 구스탑슨(Steven Gustafson), 데니스 드루(Dennis Drew), 로버트 벅(Robert Buck), 제리 오수그스티니악(Jerry Ausugstyniak)과 함께 6인조로 확정되었다. 당시 사운드는 조이 디비전(Joy Division) 같은 고딕 성향의 뉴 웨이브였다고 한다. 그룹명을 B급 호러 무비 [2,000 Maniacs]에서 따온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1982년의 EP <Human Conflict Number Five>로 출발선의 테이프를 끊었다. 이듬해 1983년에 내놓은 공식 데뷔작 <Secret Of I Ching>이 인디 차트의 정상을 차지하면서 지명도를 쌓아나갔고, 이후 1985년 메이저 레이블인 <일렉트라(Elektra)>와 제휴관계를 맺는 기회를 잡았다.


같은 해 닉 드레이크(Nick Drake), R.E.M. 등과의 작업으로 명성을 드높인 거장 조 보이드(Joe Boyd)가 프로듀서를 맡은 소포모어 음반 <Wishing Chair>으로 인디 록 차트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뒀다. 이에 더욱 자신감을 얻은 그들은 2년 후인 1987년 밴드의 최고 작품이자, 1980년대 컬리지 록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3집 <In My Tribe>를 선보였다.

빌보드 차트 44위에 랭크된 이 앨범은 밴드가 인기의 쾌속항진을 해나가던 때에 발표된 때문인지, 유난히도 낙관적인 기운이 넘쳐흐른다. 징글 쟁글 기타와 수려한 선율을 뽑아내는 피아노와 오르간, 그리고 현악기 등의 사용은 음반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밝고 힘차게 해주었고, 그러한 다양한 색깔은 포크 록의 한정된 카테고리 안에서 어떻게 하면 신선함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What's the matter here?' 'Gun shy' 등의 곡들은 아동학대, 전쟁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연이은 성공질주로 매니악스, 특히 홍일점 나탈리에 대한 언론의 플래시가 집중되었다. 그녀가 무명 시절 R.E.M.의 마이클 스타이프(Michael Stipe)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In My Tribe>의 발표 직전 R.E.M.의 오프닝 공연을 맡게 되면서 나탈리와 마이클 스타이프 사이에 염문설이 터져 나오는 등 팀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당사자들은 “서로 우정일 뿐”이라며 극구 부인했지만, 후에 나탈리가 인터뷰에서 “스타이프와 약 3년간 데이트를 하였으며 아직도 그를 하나의 아티스트로써 존경하고 있다” 라고 밝혀 소문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1989년 4집 <Blind Man's Zoo>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매너리즘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1992년 <Out Time In Eden>을 내놓으며 이전에 못지 않은 네임 밸류와 찬사를 얻었다. 수록곡 'Candy everybody wants'에서 나탈리는 캔디를 탐욕과 미움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유하며 “Give them what they want~(그들이 원한다면 다 줘버려)” 라고 외쳐댔고,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마이클 스타이프와 함께 열창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매니악스에게도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스타가 되어버린 나탈리는 나머지 멤버들의 소심한 태도에 불만을 느꼈고, 더구나 1998년 영국 투어 이후에는 뇌막염에 시달리면서 밴드의 바쁜 일정에 따라가지 못했다.


결국 나탈리는 1993년 MTV 언플러그드공연에서, 패티 스미스(Patti Smith)의 'Because the night'를 그룹 사상 최대 히트곡이자 마지막 히트곡으로 남긴 채 팀을 떠났고, 상승세를 타며 주류에서의 성공을 눈앞에 뒀던 그룹은 점점 하향 곡선을 그렸다. 솔로로 전향한 나탈리는 1995년 <Tigerlily>를 발표하며 내면세계에 천착하는 면모를 드러냈고, 무주공산의 매니악스는 1997년 <Love Among the Ruins>를 내놓았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나탈리는 1998년 <Ophelia>, 2001년 <Motherland> 등 지금도 꾸준한 솔로 활동을 하며 밴드 시절에 다 보여주지 못한 음악 세계를 펼쳐내고 있다. 하지만 록 역사는 1980년대 인디 록의 주요 그룹인 텐 사우전도 매니악스의 리더로서 나탈리 머천트를 기억할 것이다. 그녀와 결부된 이미지인 '컬리지 록 씬의 스타' 그리고 '완고한 여성상'이야말로 그 축축한 시대의 장물(臟物)이기 때문이다.